아! 제주목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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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업, 전략사업본부장 겸 논설위원

조선시대엔 전국이 강원경상전라충청경기황해함경평안도 등 팔도(八道)로 구분돼 관찰사가 다스렸다. 각 도 밑엔 부()()()() 등이 있었고, 부윤목사군수현령현감 등이 관할했다. 이 지방관들을 통틀어 수령(守令)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제주 섬은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등 ‘12체제였다. 그중 제주목은 오늘날의 제주시라 할 수 있다. 3품의 목사가 파견됐다. 제주목사는 섬이란 특성으로 전라 관찰사의 권한을 위임받아 ‘2을 통제했다. 그런 점에서 제주목사는 제주 최고의 통치자였다.

제주목 관아는 제주목사와 그의 지방관원들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관덕정(보물 제322)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주요 시설이 분포해 있었다.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다. 탐라국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 등 주요 관아가 설치돼 탐라 천년의 고도(古都)였다.

제주목 관아는 조선 500년간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조선시대 내내 증개축이 이뤄진 게다. 관아 시설은 58206칸 규모였다. 허나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돼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엔 도청과 경찰서, 법원, 검찰청 등 서양식 청사가 들어섰었다.

제주목 관아(국가사적 제380)는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역사가 응축된 현장이다. 정치와 행정, 문화를 아우르는 복합공간이자 민관의 소통이 이뤄지는 열린 광장이었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을 통해 복원한 이유다.

복원 공사는 1999년에 시작해 2002년에 완료했다. 그 결과 19533면적에 29동의 옛 건물과 시설물이 지어졌다. 특히 복원 과정에서 시민들이 복원에 필요한 기와 5만장 전량을 기부해 힘을 보탰다. 시민들 덕분에 제주목 관아가 현재의 모습으로 부활한 셈이다.

한데 최근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제주목 관아는 시민들과의 거리감이 큰 것 같다. 시민공원(사적공원)으로 개방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를 방증한다. 현재 SNS를 중심으로 청원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다. 원도심을 살리고자 하는 뜻있는 시민들이 주도하고 있다.

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제주목 관아에 살아 숨쉬는 선조들의 혼을 21세기를 살아가는 후손들과 그 다음 세대까지 품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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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안 2020-08-18 17:43:17
그곳의 표기는 제주목의 목사가 근무하는 상아라고 해야 하지요

귀하가 인정했듯이

상아와 이아 관덕정 사창 등 전체가 제주목의 관아이지요

특히 귀하는 제주목과 관아를 띄어 써서 바른 표기를 한 것은 좋은데

제주목의 상아라고 표기했으면 이런 댓글을 올릴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