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소와 걷던 길이 치유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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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이 흐르는 풋감마을 볼거리도 많아
제주 목축문화의 상징 쉐질, 명품길 진화
소길리 마을 명칭 유래인 소가 다니던 길 풍경.
소길리 마을 명칭 유래인 소가 다니던 길 풍경.

제주도는 가는 곳마다 비경과 비사가 숨겨져 있다. 질토래비는 이번에 목축문화를 찾아 중산간 마을들인 애월읍 소길리·유수암리·장전리를 찾았다. 소길리와 유수암리 그리고 장전리 마을들이 속하는 노꼬메 오름 권역은, 감귤과 축산 등을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노꼬메는 오래전 사슴이 살았다고 하여, 또는 주변의 오름들보다 높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 한다. 제주도 서부 중산간 오름들의 대명사 격인 노꼬(鹿古)메 오름을 품은 세 마을에는 제주의 목축문화를 포함한 다양한 역사문화도 간직하고 있었다.

길운(吉運)을 부르는 아름다운 마을 소길리

소길리 마을에는 집마다 거리마다 토종 풋감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정감이 흐르는 풋감마을을 지향하는 소길리에는 볼거리도 많다. 높은 관리의 무덤으로 보이는 오래된 석관묘가 있고, 봉화를 올렸던 밭인 봉화-왓도, 말을 달리고 화살을 날렸던 사장-왓도 있다. 유림들이 모여 곡을 하였다는 곡반제단은 2019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근대문화 유산으로 지정되고도 남을 1960년대에 조성된 공동 간이수도 물통도 있다. 더욱이 제주 목축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쉐질이 있다.

소길리의 마을길에서 제주의 명품길로 진화하는 쉐질은, 제주 목축문화의 상징인 제10소장 중 제5소장 일대에 살았던 목자들이 마소를 몰고 다니던 길이었다. 쉐질 주변에 형성된 소길리는 1870소의 길이란 말이 속되다고 여겨 새로운 금덕(今德) 마을 즉 신덕(新德)리로 개명한 적도 있었다. 1880년과 1891년 사이에는 이웃 마을인 장전리와 같은 우물을 마시며 사이좋게 지내는 마을의 의미로 동정(同井)리로 불리기도 했었다. 지금의 마을 이름인 소길(召吉)리는, ‘길조(吉兆)를 부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가 다녔던 길이 아름다운 소길리
소가 다녔던 길이 아름다운 소길리

치유의 길인 쉐질을 걷다

현무암 돌담 사이로 난 쉐질은 한 마리의 소가 지나갈 정도로 폭이 자그마한 길이다. 오래전 선인들이 마소와 같이 거닐었던 길이 이제는 하늘로 이어지게 하는 넝쿨 같은 신화의 길이 되고 있다. 마음이 포근해져 오는 길이고 행복을 느끼게 하는 길이기에 힐링의 길이고 치유의 길이다.

다음은 쉐질 안내판의 내용이다.

쉐질은 소를 몰고 오가던 길의 제주어다. 이를 증명하듯 소길리에는 아랫마을 구엄리와 중엄리 지역의 소를 방목하기 위해 소를 몰고 다니던 쉐질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한 마리의 소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은 비좁지만 밭과 밭 사이 난 잣길인 쉐질은 밭의 지면보다 1미터 가까이 높게 축조되어 소들이 밭으로 내려가 농작물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했다. 길의 형태는 제주의 해안선을 연상케 하듯 자유로운 곡선이 가늘고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움 속에 또 하나의 길이 마을 안에 존재하고 있다. 소길리 올레길은 현재도 여전히 비포장 흙길로 남아 있다. 그야말로 쉐질과 올레길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마을 한질에서 시작되는 쉐질은 소길리의 절경들이 모여있는 멍덕동산으로 이어진다. 앙증맞은 쉐질은 중간 지점에서 용천수인 고드레물을 만나 잠시 쉬어가는 길이다. 1평 남짓한 고드레물은 예전엔 땅에서 솟아났으나, 지금은 수맥이 막혀 더이상 물이 솟지 않는다. 그래도 사시사철 고인물이 나그네를 반긴다. 고드레물 주변에는 쉼팡돌도 있다, 나무 무늬를 입힌 시멘트 장식이 옥에 티다. 시멘트를 걷어내어 주변의 잡석으로 채워진다면, 쉐질은 목축문화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리라.

멍덕동산과 석관묘
멍덕동산과 석관묘

노천박물관 같은 멍덕동산그리고 석관묘

풋감동산이자 꽃동산으로도 불리는 멍덕동산에 오르면 한라영봉이 지척에 와있고 제주바다가 눈에 선하다. 멍덕동산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정교하게 제작된 석관묘이다. 1970년대 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성된 거리못 주변과 좌랑못일대에 방치되었던 석관묘의 판돌들을 이곳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석관묘의 주인이나 연대는 알 수 없으며, 현무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축조한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배층의 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는 고려시대부터 넓다란 목장지대였기에, 쉐질(牛路)은 마소(말과 소)의 주요 통로였고, 목장의 장밧(場田)은 목양(牧養)지 관리자와 목호들의 생활공간이었다. 멍덕동산에서 바라보는 제주바다는 한점의 수채화를, 감귤밭 너머로 펼쳐진 한라영봉은 신선이 평화롭게 노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자연경관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문화 유물유적을 품고 있는 이곳은 노천박물관 같은 평생학습의 장으로 가꾸고 보존할 가치가 충분한 곳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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