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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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불과 십수 년 전, 양복을 입던 교직 시절을 떠올린다. 교사는 학생 앞에 정장을 하고 섰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장을 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교사로서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방과 티셔츠를 입거나, 요즘처럼 캐주얼한 옷을 입고 교단에 서는 교사는 거의 없었다.

어느 해, 3생들과 원보훈련의 일환으로 한라산 1일 등산을 하던 날, 담임 한 분이 정장에 구두 신고 산을 오르내렸던 게 기억에 남아 있다. 경황없어 그랬겠지만, 관념적으로 그 정도였다. 옷은 불편해도 신발은 평소 신던 구두라 편했으리라.

정년퇴임 후 빠르게 달라진 게 복장이다. 변화가 속도를 탔다. 넥타이도 최근 몇 번 매지 않았다. 윗옷을 입어 예도를 보이기 위해 결혼 피로연에나 매다 남방셔츠로 바뀌었는가 하면, 문상 때 고집하던 검정 넥타이도 최근 들어 풀었다. 윗도리에 색깔 없는 무채색 셔츠를 받쳐입으니 괜찮은 것 같다.

하지만 곧바로 달라진 건 아니고, 나름 격식과 실용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고심했었다. 사실 그만한 갈등쯤이야 유교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의당 겪어야 하는 인사치레일는지도 모른다. 질서나 관행에는 일반화·대중화하면서 보편성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표나지 않게 자신을 맞춰 나가면 되는 일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난 치우친 선택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여러 해째, 여름 한 철 반바지를 입고 지낸다. 걷기운동을 하며, 가까운 둘레를 소요하며, 책상머리에 앉을 때를 막론해 입는다. 때로는 잠옷도 밀어낼 정도다. 반바지는 내게 외출할 때 말고 좌와기거에 붙박이로 입는 옷으로 돼 있다.

내가 선호하는 것은 무릎에서 한 뼘을 내려온 길이라 꽤 긴 편이다. 무릎 밑으로 내린 십여 센티가 마음을 편안케 하지만 이유는 모른다. 입으면 편한 게 좋아 그냥 그러려니 해 입고 있을 뿐이다.

처음엔 반바지를 입고 집 밖에 나가는 게 눈치가 보였다. 교직에 있으면서 정장이 몸에 밴 관성 탓이었을 테다. 몇 번 문간을 나들더니 고샅으로 마을 길로 영역을 넓히면서 숫제 걷기 운동복으로 등급을 올려놓고 있었다. 격식에 속박받다 풀리면서 날개 하나를 다는 게 실용인 것 같다.

() 생활도 편함에 길들이면 앞에 놓인 작은 장애쯤 눈 밖이 되는가. 지난 6월의 일이다. 작품집을 몇 군데 우송한다고 우편집중국으로 걸어가며 위아래를 훑어보니, 윗옷은 티셔츠에 아래는 집에서 입던 반바지가 아닌가. 입던 옷 바람에 나선 것이다.

주춤했다. 관공서에 반바지라니. 불볕 펄펄 끓는 하오 시간이다. “뭐 어떤가.” 이내 결단을 내렸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대기실에 가 앉는데 이내 마음이 편해지는 게 아닌가. 발치에 한 중년 남자가 반바지를 입고 앞으로 두 다리 주욱 펴고 앉아 있다.

며칠 뒤, 금융 나들이를 하면서도 반바지를 입었다. 은행은 더 압축된 공간이라 거북할 것 같았는데, 가는 길에서 이미 심드렁해 있었다. 휘둘러보지만 반바지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도 없는 것 같다.

청바지는 미국인들의 작업복이다. 얼마나 실용적인 옷인가. 신축성이 빼어나 착복감이 좋은 데다 모질이 질겨 오래 입을 수 있다. 도랑 치고 가재 잡기인데, 가재가 여러 마리 잡힌 격이다. 반바지도 한가지다.

매일 빨아야 하니 아내의 고생이 크다. 그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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