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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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영 수필가

외갓집은 도심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초가집이다.

외할머니가 떠나시고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추억에서 멀어져 가던 집이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마음먹고 외가를 찾았다. 틈이 많이 벌어지고 구멍이 군데군데 나 있는 나무대문을 가만히 열고 들어서자, 백세를 바라보는 외숙모가 놀라는 표정으로 맞아주셨다. 200년을 넘긴 이 고택은 부엌과 화장실만 조금 개조되었을 뿐 내 기억 속의 집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제주공립농업학교 학생 시절 남문통 외가 근처에서 하숙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예의 바르다고 동네에 소문이 난 아버지를 집에 오도록 하여 조선 말기 9품 관직인 조방장을 역임한 외증조부에게 한학을 배우게 하였다. 아버지는 제주 첫 여성 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 출신의 규수를 아내로 맞으면 집안을 개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어 여러 통의 편지로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당 한편에 있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이층마당이라고 불리던 조그만 뜰이 있다. 고목 한 그루가 가지를 넓게 드리운 채 변함없이 서 있다. 가벼운 미풍에도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폼이 옛 지인을 만난 표정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몫까지 안고 사셨다.

시내 J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가 4·3사건으로 돌아가시자 우리 가족은 친할아버지의 부름을 따라 고향인 애월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판사로 있던 외숙부가 적극 반대했으나 어머니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집안을 개화시킬 것이라는 아버지의 기대와 믿음을 저버릴 수 없는 약속 때문이었을까. 큰며느리 역할과 다섯 자녀를 혼자 키워야 하는 중년 여인의 삶이 시작되었다.

본도 최초 관악대를 창단(1947)하며 음악교육에 열정을 쏟던 큰오빠가 4·3사건 2년 후 몰아친 예비검속에 끌려가 바다에 수장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어머니는집안의 주춧돌이 무너졌다.”고 울부짖었다. 어머니는 큰오빠의 유품인 여러 종류의 관악기를 궤짝에 담아 고방에 간직했으나, 기타만큼은 건넌방 옷장 안에 세워 두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철부지인 나는 몰래 옷장 문을 열고 !”줄을 튕기면 안방에서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시간이 흐르자 어머니의 한은 기타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고등학생인 작은오빠가 기타를 배우려고 하자 악기에 대한 금지령을 푼 것이다.

성이 박 씨인 어머니에게, 당시의 한 야당 국회의원의 이름을 따서 박순천 여사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마을의 부인회장으로서, 국가의 정책 사업인 문맹퇴치 운동에 앞장서서 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못마땅한 정책에는 쓴소리를 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당하고 꿋꿋한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우리 네 자매가 모이면 어머니의 열정과 재능에 대하여 얘기를 하지만, 소심한 나는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 지인이 모자를 선물했다. “학교에 갈 때 꼭 쓰고 가야 한다.”어머니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마음이 약한 나는 유별나게 모자를 쓰는 게 싫어서 그만 어머니의 법을 어기고 말았다. 그 후, 어머니의 법은 모자를 쓰고 싶을 때만 써도 된다.’로 개정되었다. 이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듬뿍 담아 쓰고 다닐 예쁜 겨울 모자를 하나 더 살 생각이다.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 오고 있다.

창가에 서면 하늘 향한 나무의 독백이 들리는 것만 같아서 빈 가슴이 겸손으로 채워진다. 단풍이 드는 잎새마다 푸르던 날들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듯, 늙어가는 내 육신과 정신 속에도 어머니의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 새겨져 있다.“잊히지 않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누가 말했던가.

어머니는 늘 그리움으로 내 곁에 살아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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