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제주농업학교 학생, 일제의 민족 차별 노골화 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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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운, 제주목사·공적비 세워져
김흥채, 제주민란·농민 봉기 주도
김희돈, 후학 양성하고 시문 즐겨
김희두, 제주향교 대성전명 지어
김희봉,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돼
김희선, 유시 모은 농은시집 보존
3년제 제주공립농업학교이던 1938년의 수업장면. 제주농업학교 학생이였던 김희봉은 민족 차별을 노골화하는 학교 당국에 대항해 동맹휴학에 참여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흥운金興運1622(광해군14)~1644 (인조22), 제주판관. 제주목사, 자 군원(軍遠), 호 구암(龜菴), 본관 나주, 김진金鎭과 어머니 남원南原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647(인조25) 9, 유응문(劉應文)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50(효종1) 3월에 떠나니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려 비를 세웠다

김흥채金興彩?~1863(철종14), 제주 민란의 주모자. 일명 김응처(金應處), 제주목 봉개리 봉아름태생이다

1862(철종13) 2월 제주목사 임헌대(任憲大)가 부임, 삼정의 문란으로 관원들이 화전세(火田稅)를 과중히 책정하여 민심이 이반된 때였다. 이는 곧 제주의 임술민란으로 불붙어 세 차례에 걸쳐 농민이 봉기하였다

1차 봉기는 같은 해 912일 조만송(趙萬松·덕수)에 의해 주도되고 또 제2차 봉기는 106일 강제검(姜悌儉·광청, 현 서광)과 현재득(玄才得) 등의 주도하에 1만여 명이 일어났다

3차 봉기는 동 1115일부터 129일까지 강제검, 김흥채(金興彩), 박흥열(朴興悅), 조만송 등이 주도하는 민란으로 2차 봉기의 2배도 넘는 수 만 명이 참가, 민란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민란은 제주안핵겸찰리사 이건필(李建弼)에 의해 이듬해 4월에 완전히 수습되었다

이에 앞서 유학자 매계(梅溪) 이한진(李漢震)18631월 창의(唱義) 궐기 통문을 돌려 의병에 참여하도록 호소하였다

제주목사 정기원(鄭岐源)과 제주찰리사의 별단에는 향교의 장의(掌議) 이진조(李鎭肇), 훈장 김종운(金鍾運), 유사 고경준(高景晙) 등이 함께 방()을 붙이기도 하였다. 김종운은 글을 짓고 고경준이 써서 도내 유림에게 충효에 힘쓰며 민란을 진정하도록 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김희돈의 저서.
김희돈의 저서.

김희돈金熙敦1863(고종1)~1946(분단시대), 훈장, 그가 남긴 수은시집수은문집이 전해진다. 본관 김해, 명문가 묵동(墨洞) 김씨로 이동(梨洞) 김씨와 쌍벽을 이룬다. 자는 자위(子爲), 호 수은(水隱), 김현병(金鉉柄)의 아들로 태어나 향리인 조천리에서 서당 훈장으로서 후학을 가르치는데 일가견(一家見)을 이루었다.  

평생 시문을 즐겨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늘 묵동(墨金)의 김희주(金熙冑·평창군수)와 이김(梨金)의 김응전(金膺銓·해미현감)과 모든 일을 의론하였다. 전자는 김수은시집에 시 25수와 수은재시집45수가 수록되었다

2003년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에서 탐라문화총서(19)로 영인(影印)하여 오문복(吳文福)이 번역하여 발간되었고, 후자는 기() 3, () 2, 행장 4, 갈문 2, 제문(祭文 )3, 축문(祝文) 3, () 11, 계사(啓辭) 1, 증답시(贈答詩), 찬양문 등 을 영인해 오문복이 번역하여 2005년 탐라문화총서(20)로 발행했다. 그의 문맥은 김병택(金炳澤) 박사로 이어져 다시 발현(發顯)된다

김희두金熙斗1864(고종1)~1904(광무 8), 제주관찰부 주사, 한말의 향교 훈장. 자 자건(子建), 호 낙천(樂泉). 본관 김해, 김상인(金尙仁)의 아들로 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제주관찰부(觀察)주사와 제주향교의 훈장을 역임, ‘모흥혈단(毛興穴壇) 전사청(典祀廳) 개건기제주향교 대성전명(大成殿銘)’등을 지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사후 이병관(李炳觀)이 서문을 쓴 낙천집이 그의 맏아들 김범준(金範峻)에 의해 엮어졌다

김희봉金喜奉1907(광무11)~1991, 제주농업학교의 학생운동 및 일본 공산당의 항일활동. 본관은 경주, 김석주(金錫柱)의 아들로 산남 대정읍 신도리 -에서 태어났다. 제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는데 2학년 때 동맹휴학으로 퇴학조치를 당하였다

이것은 6·10 만세 운동이 제주도로 파급, 1926625일 제농(濟農) 1·2학년 학생 전원이 일본인 교장서리 야나기다(柳田彦二)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맹휴(盟休)에 돌입한 때문이다

야나기다는 전임 미마(美馬米吉) 교장이 순직한 후 교장 직무 대리로 집무하였는데 전임자가 민본주의 사상을 지닌 인격자로 숭배를 받은 반면 야나기다는 실력 부족과 말을 할 때마다 조선인을 얕잡아 멸시하고 민족 차별을 노골화시켜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동년 712일 학교 당국은 맹휴한 1·2학년 학생 전원에게 무기정학 조치라는 초강경책을 썼다

이에 동창회·학부형회·유지들은 긴급히 모여 대책 위원으로 홍순녕(洪淳寧), 장용견(張容堅), 채수용(蔡洙鎔), 고석종(高碩鍾), 장희순張禧淳 5명을 선출하여 학교 당국에 맞섰다

일제는 결국 야나기다(柳田)를 평북(平北)으로 좌천시키고 재학생 강일빈(강일빈행원), 문두희(文斗熙·애월 고성), 양유생(梁酉生·상모), 문승권(文昇權·동명), 최봉섭(崔鳳涉·어음), 강창거(姜昌擧·용담), 김창일(金昌鎰·가파), 김희봉(金喜奉·신도) 등을 퇴학처분을 했다. 김창일은 1학년 학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2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193110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년 11월 일본 공산당의 외곽 단체인 전협全協 섬유노조 와카야마(和歌山)지부의 책임자로서 항일 활동에 앞장섰다

이 무렵 그는 같은 향리 출신 후배 김익휴(金益休)를 만나 사회의 모순과 일제의 민족 차별에 공분을 느껴 사회주의의 서적을 탐독하게 되었다

19332월 일본 사람 니시무라(西村)의 권유로 일본 공산당에 입당하여 적기(赤旗)’ 배포 책으로 활동하던 중 동년 4월에 검거되어 193425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희선金熙璿1863(철종14)~1898(광무2), 선비. 서예가. 자 순형(舜衡), 혹은 사형(士衡), 호 농은(農隱), 본관 김해, 조천리에서 정의현감 김기행(金沂行)의 손자, 김규병(金奎柄)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의 문하생으로서 한시를 잘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특히 해서(楷書)와 반행(半行)에 능하였다.  재주가 좋고 품행이 단정하여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한편 그의 유시(遺詩) 70여 수를 모은 농은시집이 집안 후손 김진주(金鎭洲)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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