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어도, 널개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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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수필가

어머니와 저녁을 먹고 혼자 바닷가로 갔다. 수평선에서 반짝이는 조어등이 어둠에 덮인 바다와 밤하늘의 경계를 길게 긋는다. 잔잔한 바다에 불빛이 일렁이고 밤하늘의 별은 바다로 쏟아질 듯 반짝인다. 바람이 세게 불고 구름이 잔뜩 끼었다면 파도는 하얀 물꽃을 일으키며 달려들었을 거고, 나는 두렵고 컴컴한 기운에 밀려 서둘러 자리를 뜨고 말았을 텐데, 삽상한 기운이 해찰하긴 그만이라 풀썩 방파제에 주저앉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고향 바다는 저녁놀이 붉게 물든 바다였다. 나는 시내에서 자취하다 주말이면 집으로 왔고, 다시 일요일 저녁에 시내로 돌아갔다. 버스정류장이 바닷가에 있어서 바다는 오가는 나를 마중하고 배웅했다. 집으로 오는 토요일 저녁도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일요일 저녁도, 바다가 붉게 물드는 시간이었다. 유난히 노을이 붉은 날엔 온통 주황으로 물든 바다에 어찌할 바를 몰라, 바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어 바라보곤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바다는 보통 심술궂지 않았다. 버스를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나 버스를 타러 내려오는 길이나 호된 바닷바람을 맞아야 했다. 게다가 하얗게 몸을 뒤집으며 달려드는 파도는 어찌나 무섭던지,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빨려드는 상상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바다에선 누군가 익사했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돌았다. 그런 날이면 예민했던 나는 이 세상과는 또 다른 세계가 그곳에 있어 누군가의 영혼을 붙잡아 버린 것은 아닐까, 물질하는 어머니마저 그 홀림에 들어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곤 했다.

어머니는 구덕에 눕힌 갓난쟁이 동생을 어린 내게 맡기고 그 바다에 들었다. 아기가 울 때는 구덕을 흔들어주면 된다 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두려움이 적지 않았다. 숨비소리가 멀어지고 어머니가 조그만 점으로 보일 때까지 언덕배기에 앉아 구덕을 꼭 붙든 채 어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물거품이 꺼지듯 그 한 점이 사라져버리면 어머니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나는 소리쳐 엄마를 불러보곤 했다. 한참 지나 물질을 마치고 나온 어머니의 몸에선 푸른 바다가 흘러내렸다. 미처 젖은 적삼을 벗지도 못하고 서둘러 동생에게 젖을 물리던 어머니에게서 안도와 서글픔을 보았다.

타국에 둥지를 튼 지 오십여 년이 넘는 외삼촌은 고향에 올 때마다 바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일본에서 태어나 그곳에 사는 칠순의 사촌 오빠도 아버지의 고향인 이곳을 찾았을 때, 죽으면 화장을 해서 보낼 터이니 이곳에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술 한잔 걸치고 한 말이었으나, 타국살이에 지친 그들의 영혼이 느껴졌다. 고향을 떠난 자들의 마음에 이 바다는 늘 돌아오고 싶고, 마지막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이어도가 아닐까.

지금 고향 바다는 내가 기억하는 예전과 아주 달라졌다. 물에 든 어머니를 기다리던 언덕배기도 수많은 기암괴석도, 흔적없이 사라져버렸다. 불이 일듯 솟구쳐 화상수라 불리던 용천수는 잦아들어 명맥만 유지하고, 고운 모래톱을 둥글게 보듬어 안고 누웠던 원담은 높다란 방파제에 밀려났다. 일본군들의 무덤이 있어서 비만 오면 말발굽 소리와 제식훈련 하는 소리가 들렸다던 마냥물근처엔 하수종말처리장이 들어섰다. 많은 것들이 사라졌고 또 새로운 것들이 흘러왔다. 한여름 조무래기들이 놀던 바다엔 스노쿨링 붐이 일어 멀리서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대로 있어도 참 좋았을 것들인데, 한번 사라지니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내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가 몸을 담고 살았던 바다에서 살랑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비릿한 어머니의 살내가 묻어난다. 한때 기다림과 두려움으로 여린 가슴을 흔들었던 곳,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흔들었던 곳이다. 지금은 흐트러진 심사를 부려놓고 생명력을 얻어 다시 내 삶터로 돌아가는 곳, 나의 이어도, 널개바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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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템 2020-08-28 16:33:15
지금 포구에서 바다를 바라봅니다. 사라져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되어가는 게 아깝습니다. 좋은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