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물에도
한 방울의 물에도
  • 제주일보
  • 승인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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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주 수필가

부엌 한편에 이천 쌀자루가 눈에 띄었다, 예로부터 이천은 땅이 넓고 물, 토질, 기후의 이상적 조건으로 밥맛이 뛰어나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이 재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밥이 찰지고 맛이 좋아 평소 즐겨 먹는 쌀이기도 하다.

중부와 남부지방을 오가며 내리던 폭우에 이곳 이천도 피해를 비켜 가지는 못했다. 물을 가두어 놓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던 농업용 저수지가 붕괴되면서 아랫마을이 통째로 물에 잠겨 버렸다. 물건 하나 챙기지도 못한 채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 주민들은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기름기 자르르한 쌀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햇빛, 바람, 물이 어느 것 하나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여러 날 많은 비가 내리면서 논과 밭이 토사로 넘쳤고, 창고용 컨테이너 박스가 물에 휩쓸려 처박히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피해도 엄청나다. 다리가 끊어지는가 하면 산이 흘러내리고 마을이 호수로 변해 아예 보트를 타고 다녔다. 급작스레 불어난 거센 물살이 외양간을 덮치면서 하릴없이 떠내려가던 황소가 애틋하게 운다. 손도 쓰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불가항력의 현실 앞에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격정과 분노보다는 오히려 채움과 비움의 의미를 재정립하지는 않았을까. 평생 쌓아 온 탑이 눈앞에서 멸실하고 있었으니.

다행히 물이 줄어들자 허우적거리던 황소가 어딘가에 멈추어 섰다. 발이 지붕 콘크리트에 닿으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것이다. 소들이 집의 옥상에 올라간 모습을 보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 겁에 질린 소들이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서로를 의지하는 듯했다.

지구의 모든 생명들은 스스로 목숨을 지키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생태계의 본연이자 자연의 질서다. 한강에 물이 차면 다리 위로 꽃게들이 까맣게 기어오르고,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다시 강으로 돌아간다. 위험이 다가옴을 감지하고 재빠르게 행동하는 그들의 민첩함. 태풍이 부는 날, 위험을 알리고 주의를 주었음에도 제대로 지키지 않아 목숨을 잃는 사람의 경우와 사뭇 비교되는 모습이다.

어느 음식점에 갔을 때다. 음식값이 싸지 않은 곳임에도 사람들이 줄을 섰다. 어떤 가치가 있기에 이렇게 모이는 걸까. 잠시 후, 가지고 나온 음식을 보니 빛깔도 예쁘고 맛도 좋은 데다 접시에 담긴 모양까지 단정했다.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손님을 맞는 요리사의 정성이었음을 알았다.

평소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많은 이의 수고로움이 따른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오늘도 감사합니다.’라는 감사 의식이 떠오른다. 아무리 가물어도 한 방울의 물이 있으면 온 대지를 적실 수 있고, 한 알의 씨앗이 있으면 수백 만년의 미래가 펼쳐진다고 한다. 한 방울의 물과 한 알의 씨앗에는 압축된 우리의 희망이 들어 있으니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벼들이 벌써 노랗게 익어 간다. 수확의 기쁨을 누려야 할 시기에 수해로부터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플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서 빨리 복구되어 평화로운 농촌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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