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기억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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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현 수필가

긴장 된다. 저녁식사 후 옛 이야기 하던 중 아내가 결혼 전 약속을 들추어내며 웃고 있다. 그때 약속 중에 지켜지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까맣게 잊은 약속들을 아내는 다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간 나의 무관심과 서운했던 언행들을 세세히 잊지 않고 있다.

추억이 깃들어 있는 정 붙은 일들을 잊었음에도, 불편했던 기억들은 덜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나만 잘못했고, 아내는 항상 옳았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 모든 일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는 게 대단하게 여겨진다.

생각컨대 내가 일 때문에 면담했던 여인들도 남자에게 서운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은 매우 선명하고도 소상했다.

차츰 아내와 잘잘못을 따지는 어리석은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시비(是非)를 가리다 심사가 뒤틀리면 그동안 섭섭했던 일들을 일사천리로 몰아붙인다. 결혼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잘못한 일, 섭섭했던 일들이 어찌나 많은지 날밤을 세워도 모자랄 판이다.

그때 말했잖아요.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는,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음식으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놓고는.”

나는 엊그제 일도 다 잊어버렸는데, 그 오래된 일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더 이상 대꾸할 능력 상실이다. 변명 없이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내가 정색하며 저와 이야기 좀 해요라는 말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근래 있었던 일들을 되새기느라 두리번거리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 어쩌란 말이냐.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기억력도 탁월하셨다.

살아온 세월을 말씀하실 때, 마음에 상처 입었던 일들을 어찌나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던가. 할머니도 그러하셨을 것이니 여인들은 모두 천재라 할 만하다. 혹여 독자께서 아내와 말다툼 하려면 조심할 일이다. 그녀는 천재이므로.

여자는 상황 판단력도 남자보다 한참 위지 싶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나는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데 아내는 이미 방침이 정해져 있곤 했다. 남자는 좌·우뇌를 연결하는 뇌량 발달이 모자라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게 시원찮다고 한다.

한꺼번에 여러 창을 열어놓고 여러 작업을 하면 과부화로 일을 망치는 구식 컴퓨터와 같다고나 할까. 여자는 다르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하던 일들을 빈틈없이 해치우고, 요리를 하면서도 TV 시청에 이무런 불편이 없어 보인다.

뿐인가, 남여가 만났다 치자. 남자는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시원찮은 머리를 쥐나게 굴리고 있을 때, 여자는 이미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프러포즈를 한다면 어떻게 거절할까, 받아주되 어떻게 여유를 부릴까 결론을 내린 뒤일 것이다. 특유의 순발력이지 싶다.

남자가 여자에 비해 기억 능력이 열등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자의 기억력이 탁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불가사이하게 여겨진다.

혹여 여자의 기억력이 뛰어난 것은 불행을 잊지 못하는 천성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에 더하여 여자는 직관력이 좋다. 직관력이 예민한데다 기억력까지 탁월하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나이가 들면서 날이 갈수록 나는 아둔해지는 듯한데, 아내의 기억력은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반격의 묘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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