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에서
지구촌에서
  • 제주일보
  • 승인 20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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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가을을 이고 오는 풀벌레 소리가 허공을 수놓는다. 시원한 바람이 악수를 청하며 스친다. 잦아들 줄 모르던 폭염도 다가오는 계절 앞에 나부죽이 엎드리고 있다. 우주를 굴리는 시간에 감히 무엇이 맞설 수 있으랴.

그런데도 가혹하게 일상을 뒤트는 코로나 감염병은 물러설 기미가 없다. 믿노니 기세등등한 그대도 반드시 절멸할 날이 올 테다. 고갈되는 삶의 에너지를 서로 격려하며 충전하길 기원한다.

지인이 보내준 짧은 동영상을 보며 코로나19가 빚은 참혹상에 말을 잃었다. 미국의 어느 모래 해변에서 여러 구의 시체들이 물결 따라 밀려오고 밀려가는 장면이었다. 돈이 없어 병원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바닷물 속으로 걸어가 생을 마감했다니, 가난이 원수란 말은 어디서나 통용되는가 보다. 황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물가로 밀려오는 주검을 건져 올려 검은 자루에 넣는 모습이 처연했다. 가족의 눈길도 못 받고 쓸쓸히 묻힐 운명이 자꾸만 연상되었다.

코로나19의 치명률이 3.1%이고 확진자 수가 세계 1위인 미국으로 파견되어 올해 초부터 근무하는 큰아들의 안위가 늘 걱정된다. 앨라배마주 리 카운티에 있는 공장에서 ‘쇼바’라 불리는 자동차 부품 쇼크업소버(shock absorber) 생산을 관장한다. 처음 맡는 직책이라 직원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큰 차질 없이 라인을 가동한다니 다행스럽다.

통화할 때면 빈 메아리인 줄 알면서도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조언한다. 감염병에 유념하라고 졸이는 마음을 전한다. 복면강도를 떠올리는 문화 탓인지 방역을 위한 마스크 착용마저 저조하여, 미착용에 500불의 벌금을 부과하고 나서야 거의 모두 착용한다는 말에 다소 안심이 된다. 안타깝게 공장 직원도 십여 명이 감염되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의료비 문제로 집에서 가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얼마 전에 아들은 ‘영끌대출’하여 방이 세 개인 타운하우스를 매입했다고 털어놓았다. 아빠 찬스라는 말을 몰랐더라면 좋았을 걸, 축하하면서도 디딤돌이 못 되어 착잡했다. 유일한 가구는 이전에 근무하다 귀국할 때 지인에게 주고 왔던 침대가 그대로 있다기에, 도로 가져다 임시로 사용한다며 나직이 허허 웃었다. 그 웃음이 아비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바빠서 가구 사러 다닐 시간마저 없는 아들의 생활과 나의 빈 지갑이 마주하는 심경이라니.

이번 달에 익산에 사는 아내와 딸을 맞아들여 알콩달콩한 가정생활을 꿈꾸던 계획도 감염병의 훼방으로 내년 초로 미루었다며 아쉬워한다. 계속 외로운 섬으로 버텨낼 수밖에 없는가 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국에서 땀 흘리는 아들이 한편 대견하고 서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현실이 야속하다. 일상이 힘들수록 꿈이 필요하다기에, 그곳 생활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발휘하길 소망해 본다.

돌아보니 우리는 이미 지구촌 사람이었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웃의 일처럼 영향을 주고받는다. 어느 곳이 밝으면 이곳도 밝아지고, 어느 곳이 슬프면 이곳도 슬퍼진다. 코로나는 교훈을 각인하고 떠날 것이다. 인류의 공동선을 위하여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지구를 보듬으며 살아가라는.

태풍 마이삭에 할퀸 나뭇잎들이 마당에 널브러져 있다. 비질하노라니 생명체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삶은 때론 처절하게 부서지는 거라고. 너의 안녕이 나의 안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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