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감 그리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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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서로의 속정을 드러내어 친밀감을 내보일 때 우리는 이런 감정을 우정이라 한다. 좋게 여기는 감정에서 움트는 것으로 그 기반은 호감이다. 호감으로 긍정적인 마음이 고양(高揚)된다.

호감은 먼 데 있거나 막연한 게 아니다. 그가 나를 혹은 내가 그를 바라보는 관심의 눈길을 발견하고 그것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 그러니까 눈을 맞추고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 그게 호감이다.

사랑은 호감에서, 호감이라는 잘 숙성된 좋은 감정에서 발원한다. 호감이 전제되지 않은 사랑은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거나, 있어도 허술할 수밖에 없다. 이운 잎은 꽃으로 말하려던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있다.

하지만 호감이 사랑은 아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근본적으로 말해 호감은 허울을 벗듯 그럴싸해 보여도 실은 상상과 높이에 불과하다. 사랑과 호감은 결국엔 서로 다른 메커니즘으로 움직이게 된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 한다. 아낌없이 주련다 하잖는가. 일부를 내가 그에게 던지고, 그에게 맡기는 것, 그렇게 그의 뜻도 받아들이는 것, 같이 아파하고 같이 슬퍼하는 것이란 의미다.

경우가 다르지만, 요즘 내 몸에서 비호감을 발견해 자신에 대한 호감에 너울이 치면서 나를 밖과 차단한다. 갑자기 내가 일그러져 버렸다. 그러나 나에 대한 호감을 버리지 못하는 게 범인(凡人)의 처사다. 어떻게든 나를 열렬히 사랑해 온 그 순일한 감정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몸도 어느 지점에서 응답하며 다가오리라.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은 독백이 되고 홀로 하는 것은 고적하고 고독하다. 너무 엉성하고 헐겁긴 하지만, 무엇엔가 빠져드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나는 호오(好惡)를 떠나 식물에 상당히 호감을 갖는다. 그것은 한곳에 뿌리내리는 생애의 일관성과 타자를 해치지 않는 초본의 순진한 성정에 연유한다.

읍내 정원에서 작은 숲과 함께하다 시내 아파트로 떠나왔다. 당장의 결핍은 ‘식물 없음’이다. 조경수와 꽃은 있어도 내 나무 내 꽃이 아니다. 섬이 된 것 같은 외로움을 뿌리치지 못해 채 설렘으로 남는다.

옆에 꽃나무를 끼고 있었다. 심록의 잎에 둘러싸여 감빛으로 우려낸 강렬한 색 불염포, 거기 뾰족히 노란 여섯 송이 꽃, 안시리움. 넉 달 전 제자에게 내 책을 보냈더니 답례로 보낸 축 화분이다. 단조한 거실이 생명의 숨결로 왕성하다. 저 꽃과 잎이 무궁무진 조화로운데 꽃말이 웬 ‘번뇌’인가. 또 ‘붙타는 사랑’이라 한 것엔 수긍하며 물뿌리개를 든다. 사랑으로 활활 불타고 있으니 내가 축축이 축여 줘야지.

오래 핀다. 집에 와 넉 달째 색깔은 퇴락했지만 어느 하나 낙화의 기미란 없다. 늦게 내놓은 꽃대의 저 파격이라니. 모도록 모여 핀 데서 번연히 이탈해 자신만의 길에 서려는가. 선택해 책임지는 자의 민낯 같아 눈길을 보내는데, 내게 중얼거린다. “설령 비호감이라 해도 몸에 들어온 것이면 핍박하지 마라. 너그러이 거둬들이라. 너의 몸의 일부로.”

안시리움에 의탁해 무거운 일상을 건너야겠다. 물주며 볕 쐬며 살랑이는 바람에 다가서며…. 바짝 끼고 앉아 아침을 열고 하루를 설계하고 빛 속을 만끽하다 어둠과도 친해지리라. 안시리움은 진화해 내게 사랑의 반려다. 몸이 저렇게 리듬을 타면 호감 아닌 것은 슬쩍 자리를 뜰지 모른다. 목말라 하고 있다. 공중분무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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