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근심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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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진 수필가

행복지수가 1위인 덴마크인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묻는다. “왜 행복한 나라에서 살지 않고 여기에 살아요?” 그들을 향해 그가 답한다. “덴마크에 사는 사람이라고 다 행복한 게 아닙니다. 저는 아내와 딸이 있는 이곳이 행복합니다.”

우리는 내가 아닌 남이 가진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 우리 사회가 관계주의적 관점이 지나쳐 그런 걸까, 상대방에게 훈수 두기를 좋아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틀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시쳇말로 오지라퍼가 된다. 품고 있으면 영원히 유지될 황금알 같은 것을 왜 움켜쥐지 않았냐는 식이다.

그러나 신문에 게재된 어느 칼럼니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이라 한다. 행복한 순간이 짧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본다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쉽게 불행할 수 있다는 견해다. 누구나 한번쯤 있지 않을까. 원하던 것을 얻었지만 그 벅찬 감정이 생각보다 빨리 사그라진 경험이.

소소한 근심이 있다는 것은 이를 압도할 큰 근심이 없어 ‘다행이다’라는 역설적인 시각이다. 그래서 그는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고 싶다고 한다. 왜 만화 연재가 늦는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지….

누군가의 글이 혹은 말이 때때로 지난 일을 상기시킨다. 이태 전 친정에 갔더니 마루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동생과 나를 맞이하던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손에 든 마트 봉지에 대해 한마디 툭 던질 만도한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손과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두어 발자국 떼고 주저앉는 행동, 참담했다.

평생 자식들에게 속정을 숨긴 채 투박한 말을 내뱉던, 대면할 때마다 표현의 인색함에 서운했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자식의 못마땅함을 지적하며 당신의 건재함을 보여주던 그 당당함이 간절했다. 예전과 다른 쇠잔함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날, 어머니의 모습을 본 뒤 내가 지닌 소소한 근심들이 얼마나 하찮던지.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 시간이 해결해 준 부질없는 근심들. 삶에 질량 보존의 법칙을 갖다 붙이자면 하나의 근심이 떠나자 다른 근심이 그 자리에 앉는, 사는 동안 끼고 살아야 할 것들이었다. 다 뽑았다 싶은데 비가 오면 다시 돋는 텃밭의 괭이밥처럼. 다행히 병원을 다녀온 후 어머니의 병세가 차츰 호전돼 갔다.

불청객인 코로나19가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한번 커다란 풍랑이 오고서야 잔잔한 파도가 행복이었음을 깨닫는다. 혼자 극장을 가고 싶은데 접때처럼 커플들 사이에 좌석이 배정되면 어쩌나 했던 주저함이,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메뉴를 고르지 못해 메뉴판만 들여다보던 미적댐이, 결혼식장에 입고 갈 옷을 택하지 못해 오랜 시간 거울 앞에서의 머뭇거리던 것이, 소소한 근심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사람 모이는 곳으로의 발걸음이 망설여지는 하루하루다.

어떤 이가 우리의 두뇌는 걱정이 없고 만족스러운 즐거운 상태가 아닌 생존하기 위해 걱정하고 근심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소소한 근심들이야말로 행복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싶다. 큰 근심이 없어 감사하는.

자각은 삶의 흐름을 바꿔 놓는다. 냉장고 문 앞에서 ‘오늘은 뭐 해 먹을까’ 하는 이러한 소소한 근심들이 행복임을, 이제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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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주 2020-10-13 07:15:28
공감합니다. 큰 근심이 아닌..소소한 근심이 생긴다면 오히려 신께 감사 의례를 표하고 역설적으로 행복을 느껴보자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