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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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가을이다. 단풍으로 가슴을 물들이는 계절, 고개 들어 사방을 바라본다. 청잣빛 하늘이 흥건히 물감 풀어놓고 얼룩진 시간의 마디들을 채색한다. 최후의 목표인 양 저렇게 몰입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가.

나무가 봄부터 초록 글씨로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이더니 가지마다 알록달록 엽서를 매달고 있다. 마당의 화살나무와 녹나무가 빨간 사연들을 서로 나누는가 하면, 소사분재도 연노랑으로 연서를 쓰고 있다. 누군들 세월 지나며 쌓인 사연 한둘 왜 없을까.

이것저것 훑어보다 내게 온 엽서를 땄다. 개야광나무의 조그만 잎사귀다. 붉은색 군데군데 검은 얼룩들이 박혀 있다. 조그만 열매들을 발갛게 익히느라 고생한 흔적 같다. 백지는 침묵의 언어라지. 귀 기울이자 눈이 먼저 읽었다.

“아프지 마세요.”

내가 내게 하고픈 말이다. 올해는 건강에 빨간불이 자주 켜진다. 3월 초 입원 치료를 받고 장염과 폐렴에서 탈출할 때 끈질기게 따라온 녀석이 있다. 낮은 빈혈 수치였다. 건강한 남자는 13g/dL 정도라는데 나는 10을 조금 넘었다. 2월 초 위장 내시경 검사에선 별 이상이 없었다. 어디서 피가 새어 나가도 이럴 수 있다며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 달 남짓 지날 때마다 빈혈 검사를 했다. 매번 비슷한 수치였다. 지난달에는 MRI 검사를 했지만 이렇다 할 문제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 달 검사에선 다행히 수치가 조금 올라간 11.3이었다. 내년 초로 다시 예약일이 잡혔다.

특별히 어지럼증이 생긴다거나 불편한 점은 없다. 다만 알지 못하는 염증이나 암 따위로 혈뇨가 생기면 큰 문제라기에 의사의 소견을 따를 수밖엔.

이뿐만이 아니다. 8월엔 오른팔에 문제가 생겨 물컵 들기도 버거웠다. 어느 병원에선 목디스크 초기라고 하고 또 어느 쪽에선 근육이 뭉친 증상이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선 테니스엘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소염제와 근육이완제를 복용하며 지인이 운영하는 한의원도 드나들었다. 물리치료와 부항 뜨기, 침 맞기를 대여섯 차례 했다. 어느 효험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아팠던 팔이 거의 나았다.

화불단행이라던가, 지난달에는 나뭇가지를 자르는데 갑자기 왼쪽 무릎에서 통증이 솟구쳤다. 움직일수록 아픔이 일었다. 간신히 주말을 견디고 월요일 아침 부리나케 가까운 정형외과에 들렀다. 검사 후 인대가 늘어났다며 일주일 치 약을 처방하고 무릎보호대를 착용토록 했다. 연골이 많이 닳거나 금이 간 탓일까 불안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양약 복용과 함께 다시 한의원을 오가며 기본적인 치료를 받았다. 봉침도 맞았다. 이제 많이 나아진 걸 보며 침의 효능을 헤아리게 된다. 아울러 절감한다, 팔다리의 충실한 그 노역의 무게를.

팔과 다리가 두 개씩인 건 협력하며 활동하라는 태초의 지시였다. 한쪽이 건강하다고 아무리 우겨도 소용이 없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습게 어깨를 결을 때 인정이 움트고 행복이 자리할 것이다. 못난 삶도 손을 잡아줄 때 인간다움이 묻어나지 않겠는가. 그게 마음의 건강이다.

불볕더위와 장마, 태풍을 견디느라 자연도 힘들었을 테다. 손 내밀면 닿을 듯한 시간이 허락지 않아 바닥으로 떨어진 대봉감 도사리들, 누런 색깔이 애처롭다. 나도 엽서를 띄운다.

‘그래, 슬퍼 하지랑 마라. 넌 최선을 다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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