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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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심 수필가

커다란 돔 한 마리가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선명한 눈망울, 치켜 올린 지느러미, 싱싱함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몸통이 연한 붉은 빛으로 반들거린다. 단단한 비늘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촘촘하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 같다. 연근해 깊은 곳에서 산다는 이 바닷물고기는 수명이 길어 생일상이나 회갑연 등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초대된다. 미끈한 자태만 보아도 바다의 왕자라 할 만하다. 찰랑찰랑, 물고기가 들어있는 양동이엔 늘 바닷물이 넘친다.

도미를 가로 눕히고 비늘을 거슬러 긁어본다. 보호본능 때문인지 몸통을 감싼 비늘은 갑옷같이 탄탄하다. 여간해선 벗겨지지 않을 것 같다. 몇 번이나 숫돌에 칼을 갈아 날을 세우며 안간힘을 써 본다. 좀체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걸 허락지 않는다. 많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거친 물살에 쌓인 더께임이 느껴진다. 이 한 마리 생선도 망망대해에서 살아남기가 어찌 호락호락한 일이었을까. 이리저리 씨름하다 겨우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제거하고 흐르는 물에 몸통을 깨끗이 씻어내니 돔과의 한판은 끝이 났다. 처음에는 생선이 조금만 파닥거려도 움찔해서 손도 대지 못했다. 미끈거리는 느낌,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조금씩 이력이 붙어가면서 장만하는 요령도 생겼다. 먼 데서 온 손님, 이제 잘 구워서 제상에 멋들어지게 올리면 된다.

얼마나 긴 시간을 살았을까. 이만큼 자라면 수명이 다하는 걸까. 어디쯤 살다 여기에 왔을까. 잘 다듬어져 윤이 나는 살결이 아직도 손끝에 남는다. 주검이 되어 누워있는 돔이 예사롭지 않다. 퍼뜩, 빙의되듯 내게로 헤엄쳐 들어온다. 그가 살던 바다는 고개만 돌려도 눈에 들어오는 가까운 곳에 있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면서도 단순히 먹잇감으로만 여겼다니. 딱 한 번 구경하는 뭍일 텐데,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잠깐 사이. 물밑과 물 밖, 존재의 생사가 오가는 그곳은 생명의 근원이며 반드시 돌아가는 만물의 고향이지 않은가. 속이 텅 빈 채 누워있어도 눈빛은 살아있는 듯 성성하다.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잔다는데 경계를 넘어서도 여여하다. 그래서 나무로 물고기를 만들어 종각이나 누각에 매달아 소리를 내게 하는가 보다. 나무로 만든 물고기는 목어라 하여 예로부터 불교 의식이나 교화의 도구로 쓰였던 불구 중의 하나다. 나무로 물고기 모양을 만들고 내장이 없는 빈 배 안을 두들기면 딱 딱 딱 소리가 난다.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의 속성을 본떠 늘 깨어서 정진하도록 수행자들을 경책할 때 쓰인다고도 한다. 예불이나 큰 행사에 법고나 범종과 함께 목어를 치는데 이때 나는 소리는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두기도 한다. 도미도 목어로 다시 태어나 모든 이의 시름을 덜어주는 소리꾼이 될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있어라.’ 어디선가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린다. 애써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무겁다. 태풍에 의해 한바탕 바닷속이 뒤집히고 나면 풍어가 든다 했는데, 내 안에 고인 것들도 바닷물로 훌훌 씻어내고 싶다.

물길을 가르며 죽 헤엄쳐 바다로 나간다. 물 위로 고개를 쓰윽 뽑아 들고 숨을 내쉰다. 가슴이 열리고 그 안으로 맑은 공기가 깊게 들어온다. 폐활량이 커지고 피돌기가 빨라진다. 마음에 가라앉았던 음울한 것들, 어깨를 짓누르며 무겁게 하는 강박적인 것들이 울음을 토해내듯 몸 밖으로 흩어진다. 오롯이 자신만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여읜 우주를 향한 독대의 순간. 가슴 가득 일어나는 희열감이 일체의 두려움을 이기는, 찰나의 경지가 이러할까. 내 안에 고정되어 버티고 있던 철책이 걷히고, 막혀있던 둑이 허물어진다. 몸이 가볍다. 배를 비우고 소리를 내는 목어처럼, 얼마나 갈고 닦으면 소리를 낼까.

불끈, 눈에 힘을 주고 먼 곳에 시선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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