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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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산을 내리기 시작한 단풍이 절정을 치고 빠질 즈음이다. 활활 불붙는 듯 온 산이 화염 덩이 불길에 휩싸였다. 저 경이로운 스펙트럼을 매개할 사실주의 언어는 뭘까.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으로 사태 났다. 어찌 땅에 발붙인 나무의 손매라 말하랴. 저 조화(造化)를 일러 요술이라 하겠다.

하지만 단풍은 나무가 만들어 놓은 실체다. 다리를 꼬집어 봐도 생시니, 곱게 채색 올린 나무의 걸작임이 틀림없다. 연년이 저렇게 자신을 기록해 놓는 개인사의 한 페이지다. 나무는 단풍으로 한 해를 마감한다. 유종의 미다. 그것은 유독 저녁놀이 아름다운 연유와 똑같다.

실은 나무가 단풍으로 곱게 치장하는 까닭이 있다. 가을이 되면 낙엽수의 잎자루에 이층(離層)이 생겨 줄기와 단절되는 게 단풍으로 이어지는 생리적 변화다. 나무는 기온에 민감하다. 날씨가 건조하고 기온이 영하로 내리면 엽록소를 내려놓고, 잎 안에 안토시아닌 색소를 머금어 붉은색으로 변한다. 이 색소를 만들지 못하는 나무들은 노랑을 띠게 되는데, 신기한 건 이 둘이 섞이면서 화려한 주홍색, 두 색의 중간색 단풍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특히 참나무·너도밤나무는 탄닌이 있어 황갈색을 띤다. 나무가 색 사이의 경계를 연결해 색의 계()를 만들어 색환(色環) 완성에 참여하니 놀라운 기예의 손길이다.

단풍은 고혹해 숨죽이게 나무가 혼신으로 만든 회심의 역작이다. 단풍 드는 수종이 따로 있다. 단풍나무, 당단풍나무, 신나무, 복자기나무, 붉나무, 옻나무, 빗살나무, 화살나무, 담쟁이덩굴, 마가목, 사시나무, 은행나무, 이갈나무, 생강나무, 느티나무, 자작나무. 참 많다.

나라마다 단풍이 저리 물드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엔 단풍을 만들어내는 나무 종이 많아 이 산 저 산 현란한 총천연색 옷을 갈아입는다. 와락 단풍이 물드니 이 나라가 아름다운 금수강산(錦繡江山)이다. 비단옷에 홍황의 실로 촘촘히 수를 놓았다 빗댔으니 수사(修辭)의 극치다. 금강산을 일러 풍악(楓嶽)’이라 한 것을 봐도 단풍이 압권임을 짐작하고 남는다. ‘풍악이 단풍 풍 아닌가.

언제였나. 문학 행사가 있어 백양사 인근 마을로 가는데, 길섶 나무 몇 그루가 불타는 것 같았다. 잎이란 잎은 다 붉게 물들어 눈을 떼지 못한다. 애기단풍이라 했다. 백암산 천년고찰 백양사 일원이 단풍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과문으로 귀동냥했을 뿐이다. 백암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오색 찬란한 백양사 일대의 단풍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곳 단풍잎은 작고 고운 애기단풍이라 그중에도 일품(逸品)이란다. 11월 하순께 만난 그 애기단풍은 절정의 끝물에 내려온 것이라, 내겐 행운이었다.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10월 하순부터 11월 중순까지 색색이 가파르다. 산마루에서 발원해 계곡으로 흐르고, 북에선 남으로 내린다. 한랭한 기온 변화추이 탓이다. 한라산에 첫눈이 내렸다 하니 단풍이 고울 것이다. 열일 젖혀놓고 산을 타면 좋겠다. 코로나로 집콕해 지친 심신을 다독일 절호의 찬스다. 천아계곡이 단풍으로 소문 탄 지 오래니 인제 기회다. 실기(失機)는 단풍에게 예도가 아니다.

산은 어서 오라 분장을 마쳤다. 코로나가 추위에 강하다 하나, 산정기를 받고 오면 고개 숙을 테지. 단풍잎 하나 줍고 와 추억의 갈피에 끼워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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