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비정치·비군사·비영리 정책으로 호응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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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보, 조선 때 정해진 도사수
문백민, 귤수소조 초상화 주인
문봉기, 임시정부 비밀 연락원
문봉택, 족청 초대 제주도 단장
문상부, 초대 명월진 수군만호
1931년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되자 일제가 제주읍사무소를 서양식 청사로 신축한 모습. 1947년 11월 5일 제주읍사무소에서 족청 제주도단이 창단, 위원장에 최광식, 부위원장에 문봉택과 오광해가 선출됐다.
1931년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되자 일제가 제주읍사무소를 서양식 청사로 신축한 모습. 1947년 11월 5일 제주읍사무소에서 족청 제주도단이 창단, 위원장에 최광식, 부위원장에 문봉택과 오광해가 선출됐다.

문방보文邦寶생몰년 미상, 관리, 제주정해진(濟州靜海鎭)의 도사수(都司守), 우도지관 문충세(文忠世)의 아들, 태종 때의 관리.

호군(護軍, 4)을 지낸 다음 1411(태종 11) 10월에 고봉지(高鳳智) 대신으로 제주정해진(濟州靜海鎭)의 도사수(都司守)로 임명되었다.

정해진은 옛날 탐라를 방어하는데 동도(東道)천호소, 서도(西道)천호소로 나누고 그 곳 주장(主將)을 도천호라 하였는데 1404(태종4)에 천호소를 정해진으로 이름을 고치고 도천호를 도사수(都司守)라 하였다.

귤수소조 초상화.
귤수소조 초상화.

문백민文百敏1810(순조 10)~1872(고종 9), 재간(才幹). 고내봉 소유자, 자는 공무(公武)이고 호는 귤수(橘叟)이다.

본관은 남평이며 애월읍 고내리 고내-에서 문처순(文處純)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 슬기로움과 그릇됨이 남보다 뛰어나 흔히 지낭’(智囊)이라고 불리었다.

고종 초기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문백민이 자신은 귀먹어리라고 칭탁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문백민은 1000여 그루나 되는 귤나무를 가꾸는 제주성안 중과원(中果園)의 주인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이 무렵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대정현에 유배되었는데 문하생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스승을 찾아 1841(헌종 7)1차로, 18432차로, 1847년에 3차로 추사를 찾아 왔었다. 그 뒤 1863(철종 14) 초봄에 소치는 큰 아들 미산(米山)을 대동하고 네 번째로 입도하니 이미 친숙한 문귤수(文橘叟)가 찾아와 초상화 그려주기를 청했다.

소치는 아들 미산에게 그리게 하고 소치는 직접 귤수소조’(橘叟小照)라는 제하에 찬()을 남긴 글씨를 써넣었다.

아마 이 귤수소조는 제주 최초의 초상화인 것으로 평하고 있다. 이때 소치 부자가 그린 산저포, 간성(間城), 선교교사 등은 제주성안의 모습을 함께 그려낸 작품으로, 불후의 작품이자 이 고장의 귀중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문봉기文奉祺1893(고종 30)~1964, 상해 임시정부의 항일활동.

임정 비밀 연락원, 본관은 남평, 문병순文秉順의 차남으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3월 조천 만세 운동에 참여, 항일 동지들이 체포되자 192011월 중국 상해로 망명을 하였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인삼 장수로 변장하여 상해 임시 정부에 접근, 김창숙(金昌淑), 손영직(孫永稷) 등 임정 요인과 만나 독립 운동을 하고 있었다.

상해에서 박은식(朴殷植, 후일 임정의 대통령)의 집에 기식(寄食)하게 되어 독립 운동의 원대한 책략을 모색하게 되었다.

김창숙과 손영직의 지시에 의해 박은식이 지은 조선독립지혈사’(朝鮮獨立之血史) 60부를 건너 받아 이를 가지고 귀국하여 김운배(金沄培, 조천)에게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상해에서 아스카마루(春日丸)로 출항하여 도중 청도(靑島)에서 19212월 한국으로 귀환하는 선편에 몸을 실었다.

과거 지면이 있는 선원 고주봉(高柱奉)에게 부탁하여 비밀리에 이를 부산에 사는 최창흥(崔昌興)의 집으로 배달하도록 하였다.

그는 당일 일본 모지(門司)를 경유, 부산에 도착하여 동월 25일에 최창흥의 집으로 가서 도착한 책자 60부가 들어있는 행랑을 도로 받았다. 이 날 동향의 동지 김동인(金東仁, 조천)의 집에 책의 든 행랑을 보관하고 그 곳에서 기식(寄食)하였다.

김동인은 조천 기미만세 당시 14동지의 한 사람으로 당시 징역 6월 형에 4년 집행 유예를 받았었다.

김동인 댁에 살면서 은밀히 활동을 하는데 상해의 손영직(孫永稷, 임정 요인)으로부터 보낸 서신을 부산의 손종현(孫宗鉉)에게 전달했으나 그 수령을 거절당했다.

이에 배로 인천을 경유하여 상경, 황금정 1정목 동창(東昌)약국에 가서 편지를 받을 성구춘(成丘春)을 찾고 있었다.

()은 지방에 내려가 만날 수 없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목적 수행을 하던 중 당국에 체포되었다.

1921625일 부산 지방 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항소하자 192189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공소를 각각 기각하므로 옥고를 치렀다.

문봉택文奉澤1908(융희 2)-, 청년운동가, 조선민족청년단 초대 도(), 원적은 애월읍 애월리 -’, 청년단체 운동가, 남평문씨 충선공 19세손 -, 성안 칠성-에서 사업하던 문창숙(文昌淑)의 장남이다.

해방공간에서 청년단체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태동할 때에 그는 자금을 대어 조선민족청년단 발기인이 되어 1947115일 하오 3시 제주읍사무소에서 족청(族靑) 제주도단을 창단, 이때 위원장에 최광식(崔光植), 부위원장에 문봉택과 오광해(吳光海)가 선출되었다.

()는 취임을 사양하여 다시 백찬석(白璨錫)을 선출, 1215일 족칭은 관덕청에서 매일 오전 6시에 국기게양식과 조기회를, 또 오후 6시에 국기 하강식(下降式)을 거행했다.

이 청년단체는 청산리전투에서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의 예하 부대장 이범석(李範奭, 광복군 지대장)이 환국, 창설한 단체이다.

1948218일 조직을 개편하면서 도위원장에 백찬석이 사임하여 후임으로 문봉택을 선출, 이어 동 310일부터 동 30일까지 70명의 단원을 대상으로 삼성혈에서 청년훈련 제1기생을 배출했다.

비정치와 비군사, 비영리를 3대 정책으로 삼아 호응을 크게 얻자 다른 청년단체들, 특히 서북청년단과 반목되어 내부에 좌경분자의 프락치를 발견하면서 위기를 맞고 더구나 동년 4·3사건으로 활동은 수면 아래로 잠겼다.

문상부文祥富생몰년 미상, 무신. 명월진 수군만호, 본관은 남평이며 제주목 안에서 태어나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했다.

1759(영조 35) 무과에 급제하고 1764년에 처음으로 명월진이 설치되자 조방장을 두었다가 동년 827일 초대 명월만호에 부임하고 17673월 임기 만료로 그만두었다.

벼슬은 무신 겸 선전관을 거쳐 부호군에 이르렀으며 네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올랐다.

그 뒤 한창 지나 1798(정조 22)에 명월진(明月鎭) 만호선생안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1798년 초대 만호 문상부로부터 1895(고종 32) 윤지일(尹志一) 만호까지 수록되고 있다.

삼성사재단에 보존 중인 명월진 만호 선생안은 곧 명월진은 1510(중종 5)에 설진設鎭하여 조방장을 두었다가 1763(영조 39)에 만호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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