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대구 지역 도민들의 정신적 지주…초대 도민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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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 대구고법 부장판사 역임
문양부, 번석·번수 민란 진압
문여량, ‘명환’ 칭호 목민관
문영현, 제주 체육발전 기여
문영후, 천문 조예, 탐라 사절
문일, 당대 뛰어난 신의 명성
재대구(在大邱)친목회 초대 회원들이 1960년 11월 23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대구고법 문양 부장판사이고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문양 판사의 부인 최효숙씨이다.

문양文洋1918(일제강점기)~?.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변호사. 제주시 도두동 몰래-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日本) 쥬오(中央)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여 1948년 제주검찰청에 재임하던 중에 미군정(美軍政)판사(判事)특별임용시험에 합격, 전주지법과 부산지법의 판사를 역임한 뒤에 대구지법과 1955년 대구고법(大邱高法) 판사시절 제주도민회의 실질적으로 정신적인 기둥이 되어 주었다.

당시 경북대 사범대 재학생인 김이종씨가 재대구제주도민회 조직의 주역으로서 문양 부장판사를 도민회 회장으로 추대시켜 재대구제주도민회의 발족이 시작되었다.

1969년 판사생활을 마감한 뒤에 대구에 영주하면서 변호사업(辯護士業)을 시작하였다.

1976년 대구시 달성공원에서 제우회(濟友會)를 중흥(中興)할 때 70여 명이 모여 도민회가 활성화되고 지명도(知名度)가 높은 그를 1978년 초대 재대구경북(在大邱慶北)제주도민회장에 추대했다.

한때 대구의 정계(政界)거물로 부상되기도 하였다.

1969년 이래 법무법인 대구종합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면서 재대구제주도민회 명예회장을 맡아 21세기 초까지 90세 노옹老翁으로 참여해 왔다.

문양부文陽夫생몰년 미상, 고려 무신. 탐라에 파견된 장군.

반란을 진압, 일명 문양중(文陽重). 문작(文綽)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신종(神宗) 때에 원수(元帥)로서 왕명을 이어받아 탐라에 출병, 이를 평정하여 임금의 큰 근심을 풀어드렸다.

희종 때에 이르러 관직이 대사마(大司馬)가 되고 대장군 평장사를 거쳐 가나군(加那君)에 봉해졌다.

이 내용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집 한훤당집(寒喧堂集)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필자가 살피건대 120210월 번석(煩石번수(煩守) 등이 민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문여량文汝良생몰년 미상, 문신. 제주목사. 한성 판윤, 본관은 감천.

1429(세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450(문종 즉위년)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영양위(寧陽尉, 경혜공주의 남편)의 집을 새로 지으려 할 때 성안의 민가가 헐릴 것이 많다고 하여 옛집을 그대로 수리하여 거주함이 옳다고 주청하였다.

1455(세조1) 군사(郡事)를 역임하였으며 1460년 집의(執義)가 되고, 1465년 제주목사를 거쳐 직제학과 한성판윤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훈(李壎)과 노비 쟁송으로 무식상소(誣飾上疏)되어 주살되었다.

1465(세조11) 2, 복승리(卜承利)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466년 윤 3월에 행호군(行護軍)으로 제수되어 떠나니, 세상 사람들이 명환(名宦)이라 칭했다.

오현단 내 귤림서원 경신재 터에 세워졌던 1910년대 제주농업학교 전경. 
<출처 :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문영현文榮鉉1906(광무10)~?, 수원(水原)고농 교유, 체육인. 제주농업학교 교사.

전북 김제군 공덕면 제말(梯末)리에서 태어나 1926년 전북공립사범학교 특과를 졸업하였다.

만경(萬頃)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나 향학열에 불타 도일(渡日), 19323월 일본체육회체조학교의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춘천고보(春川高普)의 교유, 춘천중학교 사감 등을 거쳐 1941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며칠 후에 제주공립농업학교 교유로 발령되었다.

체육·인체생리·동양사·문화사 등을 가르쳤으며 수업 시간을 통하여 은근히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더구나 육상·유도·야구·기계체조 등 현대식 경기 방법과 기법을 도입하여 제주 체육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일제 말기에 수원고농(水原高農)의 교유로 연전되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교수로 재임하였다.

문영후文榮後1629(인조7)~1684(숙종10), 문신. 전라도 곡성현감, 제주 교수. 자는 인경(仁卿), 본관은 남평, 남제공 윤남골파.

애월읍 어음리 비면이부면(夫面)이 마을 속칭 병방-우영에서 문재박(文在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가 터를 병방-우영이라 하는 이유는 향리의 병방(兵房)을 지낸 자의 집터라 하여 부쳐진 이름이라 한다.

1664(현종5) 8월에 조정에서 정언 윤심(尹深)을 제주시재어사(試才御史)로 보내어 시취하게 될 때, 문과에 문영후, 문징후(文徵後), 고홍진(高弘進) 3명을, 무과에는 업무(業武) 문창업(文昌業) 4명을 합격시켜 전시에 직부할 자격을 부여하였다.

문징후는 문영후의 종제(從弟)이다.

시제(試題)이월상씨헌백치부’(以越裳氏獻白稚賦)인데 문영후가 수석으로 뽑혔다.

1666년 식년문과 전시에서 병과(丙科)로 급제, 전라도 남원(南原)의 오수찰방(獒樹察訪), 또 곡성현감을 지냈다.

1675(숙종1) 8월 곡성현감으로 재임 때에 어떤 여성과의 불륜관계 때문에 한때 전라감사의 장계에 의해 조정에 붙들려와 심문을 받고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한편 1681(숙종 7) 문영후는 좌수 오상현(吳尙賢)과 함께 도민의 부역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진언하니 제주목사 임홍망(任弘望)은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법령을 자세히 정하여 민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그는 이러한 부역의 균등 배분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여 무명지세(無名之稅)를 혁파하니 백성들의 삶이 편해졌다.

1684(숙종10) 제주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구예도목(舊例都目)에 의하면 교수는 판관보다 상위 직급이므로 간혹 서열을 다투는 경우가 있었다.

문영후는 교수로서 공식 석상에서 판관 아래에 앉고 양현 현감의 윗자리에 앉으니 이때의 사람들이 체통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우러러보았다.

시문과 글씨에 능하고 천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복서(卜筮)를 잘하여 미래의 일을 예언, 적중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풍채가 뛰어난 양유성(梁有成), 풍수지리에 밝은 고홍진(高弘進), 의술로 유명한 진국태(秦國泰), 복서(卜筮)로 알려진 문영후를 탐라 사절(四絶)’이라고 불렀다.

문일文一생몰년 미상, 의사. 제주의 목자. 목장 제일소장(第一所場)의 목자(牧子)로서 의술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당대의 허통(許通)과 더불어 신의(神醫)라고 병칭되었다.

살피건대 옛날에는 기술인을 천시한 관계로 그들의 신상관계가 확실하게 전해지지 못한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때 어디 사람인지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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