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진, 청년동맹원 항일 활동
문정인, 정상회담 수행원 참여
문종순, 동아일보 제주지국장
문종철, 초대 국립대 학장 역임
문종학, 농업학교서 항일 운동
▲문작文綽:생몰년 미상, 고려조 명종 때의 문신. 대제학, 호는 남제(南濟), 본관은 남평이며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兼)의 손자이다. 문장 잘하기로 세상에 알려졌고 명종 때 대제학으로 왕명에 의해 탐라로 들어와 문물을 비로소 열게 하였으며 평장사로 가자(加資)되었다.
▲문재진文在珍:1910(융희4)~1959, 제주 청년동맹 성내지부와 야체이카의 항일 활동. 해방 후에 남로당 당원, 본관은 남평, 문창호(文昌昊)의 아들로 산북 삼도리 ‘무근-성’에서 태어났다.
1931년 4월에는 성내지부 청년동맹원들이 친일 단체로 보는 ‘부녀동화회’를 습격하여 간판을 떼어버리고 회의를 방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7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수감되었던 한상호·윤석원·김정로 등이 석방되어 1931년 8월 16일에 제주에 돌아왔는데, 제주 청년동맹 측에서 이들을 위한 환영회를 계획하였으나, 집회가 금지당하고 14명의 청년동맹원들이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주도 야체이카가 1931년 5월 16일에 결성된 직후 지역별 담당자들은 운동가의 확보와 먼저 1931년 6월 13일 제주읍에서 제주도 자전거 경기대회를 개최하자 이 기회를 이용, 각 지역의 운동가들을 모이게 하여 ‘제주도 소년 운동 지도자 간담회’를 개최, 강창보(姜昌輔)의 지시에 의해 부태환(夫泰煥, 신도)·박찬규(朴燦奎, 제주성안)·문재진(文在珍, 제주성안)·홍순일(洪淳日, 용담)·오문규(吳文奎, 하도)·김민화(金玟華, 조천)·김태안(金泰安, 한림)·김한정(金漢貞, 가파도)·문달모(文達模, 상모)·김중흡(金仲洽, 애월) 등이 모여 소년의 교양 문제·체육 문제·부인 문제·농민 문제 등을 협의하였다.
문재진을 비롯한 청맹원(靑盟員)들은 1931년 7월 13일 여공에 대한 노동 착취에 항의한 바도 있고, 1931년 8월 2일 청맹원들은 제주농업학교 항일 학생 운동 당시 배신자로 지목하였던 김영호가 정구시합에 참여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고 구타하였던 사건도 일어났다.
이들 일련의 사건에 청맹원 가운데 문종순(20세, 농업)은 징역 1년, 장종식(26세, 조선일보 제주지국장), 이태윤(26세, 조선일보 기자)은 징역 8월이 대구복심법원에서 언도되었다.
그리고 홍순일(조선일보 기자)은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 장공우는 징역 9월, 박찬규·문재진·김태륜은 벌금 90원, 문무현은 벌금 20원의 형이 확정되었다.
1932년 1월 해녀 항일 투쟁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비밀 항일결사 ‘혁우동맹’이 탄로되자 체포되어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문정인文正仁:1951~생존. 제주시 영평 ‘가시나물’에서 태어나 오현고를 거쳐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미국 메릴랜드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받았다.
미국 켄터키대학 정치학 교수를 비롯해 한국정치학회국제위원장, 미국규제정치학회 부회장,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 한국평화학회 회장. ‘햇볕정책 전도사’로 불리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전략가로 활동했다.
2000년 6월 이뤄진 제1차 정상회담과 2007년 10월 이뤄진 제2차 회담에서 특별수행원으로 참석한 바 있다.
▲문종순文鍾舜:1912(일제강점기)~?, 제주 청년동맹의 항일 활동. 신문지국장, 본관은 남평, 문재협(文在浹)의 아들로 제주시 제주 성안 삼도리 ‘무근성’에서 출생, 항일 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형을 받은 문종택(文鍾澤)의 친형이다.
1931년 5월 14일 문종순 등 5명이 제주경찰서에 구금되고 5월 17일 부태환(夫泰煥) 등 8명이 함께 구금당하였다.
이들은 모두 제주 청년동맹 제주읍 지부 회원들인데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투옥되었던 한상호(韓相鎬), 윤석원(尹錫沅), 김정로(金正魯) 등이 만기 출옥, 5월 16일 귀향하게 되니 청맹원(靑盟員)들이 환영회를 개최하려 하자 당국에서는 미리 주동자를 가둔 것이다.
이들은 청년동맹 제주읍지부 회원들로서 일제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던 터라 이를 빌미로 하여 이들을 구속, 1931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1936년 4월부터 1939년 4월까지 만 3년 동안 동아일보 제주지국장을 역임한 바 있다.
▲문종철文鍾哲:1908(융희2)~1979, 행정가. 전라남도 상무과장, 회계과장, 제주대학장. 본관은 남평. 제주시 삼도동 제주 성안 ‘무근성’ 문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서 교토의 제3고(第三高) 문과를 졸업, 또 교토(京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의 고등문관 시험에 응시하여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1961년 1월 제4대 제주대학장으로 취임, 이는 전년 4·19혁명으로 조현하(趙睍夏) 학장이 물러나자 교수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오응삼(吳應三) 교수를 학장서리로 추대, 반년이나 지나서 문종철 전임 학장이 발령된 것이다.
전라남도 상무과장, 회계과장 등을 역임하고 해방 후 전남 관재국(管財局) 감사서장, 정부 수립 후 법제실 제2국장을 거쳐 한때 중앙대학 및 숙명여자대학 강사로도 있었다.
재임 중 이농학부 이설 부지를 서귀읍 동홍리에 정하고 부지 매입에 착수, 1962년 2월까지 매입 완료하였다.
동년 3월 당시 도지사 김영관(金榮寬) 제독의 노력으로 도립에서 국립대학으로 승격되어 그가 초대 국립대 학장이 되었다.
1964년 4월 서귀포 이농학부 캠퍼스 준공식을 가졌고 동년 10월 용담캠퍼스 신관 신축공사를 착공하였다.
이 건물은 이중업(李重業)이 설계한 건축으로 한국건축사에 오를 정도의 유명한 작품이었다.
이중업은 이 건물에 대해 후일 애착을 느껴 “독법학자(獨法學者) 문종철 선생이 제주대학 본관 설계를 위하여 불러 주셨다. 건축이란 클라이언트와 건축가가 동심일체 될 때 비로소 쾌심(快心)의 작품이 탄생된다. 호화선 같다고도 하고 비행기를 닮았다고도 했다. 젊은이들에게 한없이 펼쳐지는 높고 깊은 꿈을 길러주려고 애써 빚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21세기의 건축이라 일컬어질 만큼 해외에서 더욱 알려져 있다. 나에게도 소중한 작품이어서 오늘에 이르러 쇠퇴해 가는 모습을 볼 때 무척이나 가슴 아프다. 길이 남겨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술회한 만큼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작품이었다. 일부 뜻있는 이들에 의해서 보존 운동을 벌였으나 1996년경 노후했다는 이유로 철거한 것은 퍽 애석한 일이다. 이는 문학상 뛰어난 예술 조형미의 발로라고 평하였다.
▲문종학文鍾學:1915(일제강점기)~1963,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2차 항일 활동. 본관은 남평, 산북 삼도리 제주성안 ‘무근성’에서 태어났다.
1930년 4월 제주농업학교 3학년을 졸업한 문종학(17) 등 3명은 1931년 10월 22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의 판결로 종결된 김만제·문종학·고경수는 징역 10월에 집행 유예 4년형을 받았다.
이들은 교장관사에서 난동을 부린 결과로 형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