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색 짙던 날
계절 색 짙던 날
  • 제주일보
  • 승인 20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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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현 수필가

한 장 걸린 달력이 또 한 해를 마무리해야 된다는 생각에 닿자 뭔가 초조한 게 더 추워진다. 요 얼마 전, 방송에서 올해 마지막 숨 헐떡이듯 넘어가는 늦가을을 아쉬움에 붙잡아 두기라도 할 것처럼, 산 한 언저리가 불붙듯 온통 단풍 든 늦가을의 정취를 TV로 방영해주었다. 저리 곱게 물도 드는구나. 가을 단풍이라 말하기엔 좀 어색한 곳에 살아 그럴까. 고운 영상에 갇혀 눈과 생각을 한 동안 뗄 수 없었다.

만산홍엽, 가을 산이 곱기를 이를 때 쓰는 말이다. 하기야 계절이 주는 고움은 지역마다 특색이 있고 결이 다를 뿐, 초록 잎에 주황빛 열매로 가지가 찢길 것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귤을 보면 넉넉하니 기분까지 좋다. 색감이 건네는 제주의 늦가을, 노랗게 귤이 익는 고움을 일컬어 귤림추색이란 말을 쓰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언뜻언뜻 나무와 나무 사이로 돌담이 이어진 과수원 풍경을 보면 어찌 곱다 하지 않을까.

추색(秋色), 그 생각으로 계절의 고움에 빠져 있을 때였다. 과수원 하는 친구가 늦은 시간 전화를 했다. 귤을 수확해야 되는데 일하기로 했던 사람이 갑자기 비게 되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될 판이란다. 일의 양을 가늠하며 연일 수눌음도 하고 또, 놉도 맞추었으나 생각지 않게 엇나간 바람에 일은 급하고 달리 방법은 없어 연락을 한다는 것이다.

알았다고 대답 후, 다음 날 어둑새벽 서둘러 과수원을 향했다. 새벽 공기는 싸하다. 도착해 보니 이미 다른 일꾼들과 귤을 따느라 저만치 가 있었고, 장갑이며 앞치마를 얼른 챙겨 합류했다. 과수원의 아침 시간은 우리네 일상의 시간보다 더 일찍 시작되는 것 같다. 찰칵찰칵 가위질 소리가 감귤 꼭지와 손끝으로 감기며 강하다 이내 약하게 운율을 탄다. 공기의 흐름이라도 읽어낼 것 같은 고요를 찰칵거리며 반복되는 금속성만이 듣기 좋은 크기로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키 높이에서 다 따면 다시 컨테이너를 뒤집어엎고 올라서서 따느라 어깨며 고개가 힘들 때쯤, 잠깐 쉬고 하자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새참 시간이란다. 아침 챙겨 먹을 시간 없이 일찍 나온 터라 그 말이 반가웠다. 간단한 음식과 함께 차를 마셨다. 늦게 오는 바람에 같이 작업하는 이들과 눈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었는데 간단한 인사로 오늘 하루 같이 일하는 식구들임을 알렸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짧은 인사가 순간 서로의 어색함을 거두어갔다.

광주리에 가득 따놓은 귤을 다시 컨테이너에 담고, 이어 정해진 곳으로 옮기느라 작업하는 이들도 각각 맡은 일과 순서에 따라 나무 사이를 타며 부지런히 움직인다. 바쁘고 지친 와중에도 어디든 분위기를 띄우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섞이게 마련인가. 차 한 잔으로 어색한 관계를 텄던 우리는 손은 부지런히 놀리면서도, 아까 마주 앉았던 한 분의 맛깔스러운 입담에 서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큰 웃음을 하늘 높이 걸기도 했다.

친구는 여기저기 오가며 뒤치다꺼리로 바쁘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아무나 해서도 안 되는 일로 시간을 부리느라 바쁜 그녀만 웃음에 동참 못했다. 일 년 동안의 걱정과 땀과 정성의 중심에 서 있는 그녀는 수고로움에 대한 몫을 열심히 줍고 있다. 하루라는 시간과 시간 사이로 언뜻언뜻 숨바꼭질하는 햇살도 채 따지 못해 매달린 열매에 색감을 덧칠하느라 온통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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