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동 안녕”, 호칭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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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혜경,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논설위원

며칠 전 방송을 보다가 요새 대학에서는 선후배라는 호칭이 없고 “○○씨”라고 부르는 유행이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호칭과 서열에 대한 예의가 매우 중요한 한국사회에서 그게 가능한가라는 생각을 하였다. 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깍듯하게 “선배님”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세대의 입장에서는 “선배님” 대신 “○○씨”라고 부르는 것은 싸움과 화를 불러오는 요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대학을 다니는 조카에게 물었더니, 선후배 구분 없이 그냥 이름으로 “누구”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씨”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홍길동 선배를 만나도 “길동, 안녕”하고 후배가 말한다는 것이었다. 영어식 표현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열을 거부하고 평등한 관계를 표상하는 호칭의 급격한 변화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여자 후배들이 남자 선배를 “오빠” 대신 “형”이라고 불렀었다. 가끔 드물게 남자 후배들이 선배들을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은 거의 들리지 않는 이 “형”이란 호칭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니던 사람들에게는 흔히 사용되었던 호칭이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남녀불평등한 호칭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그런 속에서 “형”이란 호칭이 유행하였다.

사실 호칭에는 많은 사회적 기호들이 담겨 있다. 호칭 내부에는 나이와 성별, 신분관계, 사회적 관계 등 그 시대가 요구하는 많은 정보들이 숨겨져 있다. 또한 호칭을 통하여 그 사회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가끔 한국판 카스트제도라고 불리는 이 호칭은 계몽의 대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가족 내 성불평등 한 호칭, 남편의 형제를 아주버님, 도련님, 아가씨로 높여 부르는 데 반해, 아내의 형제를 처남, 처제로 낮춰 부르는 것에 대한 개선 요구나 부계에는 친한 친(親)자를 붙여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인 반면 모계에는 바깥 외(外)자를 붙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가 등에 대한 개선 목소리가 높다.

공식적으로 신분제와 같은 계급적 질서가 없는 사회이지만, 직책을 통하여 계층을 드러내는 호칭들이 다수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대개 직책을 성이나 이름 뒤에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검사, ○박사, ○변호사, ○의원, ○회장, ○대표 등등. 외국에는 없는 꽤 많은 직업적 혹은 직책 호칭을 붙이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한국사회에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이 존재하지 않지만, 호칭을 통하여 계층성을 드러낸다.

호칭에서 숨겨져 있는 나이와 직책으로 제압하는 사회에서 평등한 관계와 대화가 오고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생들의 “길동, 안녕”은 어찌 보면 탈권위 사회로의 진입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서울대 옥선화 교수도 “외국에서는 호칭이 세분화되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서히 단순화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분석하였는데, 한국사회에서도 어느 시점에 세분화되어갔던 호칭들이 단순화 과정에 접어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사회변화와 연결된 것이다.

제주에는 이웃 모두가 “삼춘”인 호칭문화가 있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불평등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이 호칭에는 친밀감은 있으나 계급성이나 계층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하지만 친밀한 관계를 유지시키는 이런 호칭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우리도 탈권위적이고 평등한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만큼 평등한 호칭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산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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