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겨울나기
  • 제주일보
  • 승인 2020.12.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길웅. 칼럼니스트

한 생명 앞에 혹한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몇 날 며칠 몰아닥치는 폭설과 강풍은 자칫 명줄을 놓게도 한다.

더욱이 황량한 들판에 운명처럼 서 있는 초목들에겐 이렇다 할 대책이 없다. 누가 그들에게 이불을 덮어 줄 것이며, 누가 그들을 끌어안아 품을까. 쌓인 눈에 정강이를 묻은 채 냉혹한 삭풍에 휘적휘적 몸을 가누지 못한다. 저 홀랑 벗은 몸의 적나라한 절규, 귀청을 찢는다.

그나마 동물들은 겨울나기에 재간껏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누에처럼 알로 한때를 넘기거나 유충, 성충으로 난다. 번데기로 집 속에 들앉기도 하고, 뱀, 개구리같이 땅속에서 잠에 빠지기도 한다. 난방이 필요 없다. 계절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기막힌 월동이다. 오히려 성장과 활동을 일시 멈추는 생리적 상태로 추위를 따돌린다. 휴지(休止)라는 비주기성 저온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상당히 진화했다. 놀라운 전략이 아닐 수 없다. 혹한이라 하나 그들에게 겨울 추위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한다.

무당벌레는 월동 개체군을 형성한다. 닥지닥지 몰려 달라붙은 개체군(群)이 한 덩어리가 돼 체온을 나누며 성공적인 겨울나기에 나선다. 굴에 숨거나 땅속을 파고드는 녀석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한곳에 뿌리박은 식물에겐 뾰족한 내한(耐寒)의 대책이 없다. 잎 진 가지가 한동안 눈바람에 할퀴고 나면 바싹 말라 죽은 몰골이 다돼 있다. 겨울이면 연년이 겪는 자연 속 이 핍박은 방임되거나 방치될 수밖에 없는 생존의 일대 수난이다.

수국을 화분에 가꿨던 경험이 있다. 겨울은 수국에게 고난의 계절임이 분명하다. 첫여름의 그 풍성했던 잎과 빛깔을 바꿔가며 주렁주렁 꽃송이를 달았던 기백이라곤 온데간데없다. 늦가을 찬바람 앞에 쪽을 쓰지 못해 다 벗어 던지고 혈혈단신이다. 참 앙상하다. 파삭 말라붙어 죽은 것 같다.

죽은 것 같지만 절대로 아니다. 죽은 듯이 있을 뿐이다. 내년 잎을 내밀고 형형색색 꽃을 선보이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다. 아파트라면 베란다나 복도, 그게 안되면 창고나 보일러실도 좋은 월동 장소가 돼 준다. 어두침침해도 상관없다. 잎이 없어 광합성을 하지 않으니 빛이 안 들어도 괜찮다. 기온이 영하로 들쑥날쑥 오르내려도 바람만 막아주면 된다. 물도 절제할 줄 알아, 흙이 말랐을 때 한 번씩 물뿌리개로 뿌려주면 아주 좋아한다. 생명은 가지 끝에 달려있는 눈, 눈만 가지고 있으면 월동이란 가파른 능선을 거뜬히 넘는다.

얼마 전 게발선인장 화분을 선사 받았다. 희한하게 바다에 사는 ‘게발’을 닮았다. 마디마디 잇대며 벋어나가는 성장세를 보며 내가 쏙 빠져 있다. 6월 개화해 집에 와 겨울 초입인 지금까지 꽃을 달고 있는 안시리움과 같이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었더니, 기세 활발하다. 낯선 녀석이라 검색창을 뒤적였다. 겨울 한철 실내라야 한단다. 겨울 들머리에 바람이 매몰차니 올 추위도 만만찮을 것 같다.

녀석을 거실 깊숙이 들여놓으려 한다. 품에 안아 주면 저도 무심치 않는다지 않은가. 밤엔 산소를 내뿜는단다. 오래전에 보았던 분홍색 꽃이 마디마디 돌아가며 삐죽이 내밀 날을 기다린다. 나 좋고 저 좋으니 영락없는 자리이타(自利利他)다.

한라산 상고대 소식에 올해도 저무는구나 하던 날, 찬비 뿌리는 베란다 창가에 비둘기 한 마리 내려앉았다. 춥겠다. 저러고 어떻게 겨울을 나려는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