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반외세·반일 부르짖은 철저한 민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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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혁, 해방 후 제주의원장
문종후, 의료인력 양성 업적
문징후, 조선 문신 제주 교수
문창래, 통아통합조합 활동
문창송, 광복회·경찰관 경위
제주와 오사카를 오갔던 정기선인 군대환(キミカヨコマル, 기미가요마루). 일본배들이 자주 운항을 하게되자 문창래와 김달준(하귀)은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1930년 3월 제주통항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제주와 오사카를 오갔던 정기선인 군대환(キミカヨコマル, 기미가요마루). 일본배들이 자주 운항을 하게되자 문창래와 김달준(하귀)은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1930년 3월 제주통항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문종혁文鍾爀1920(일제강점기)~1956, 제주도립 제주의원장, 개업의사, 문재범의 아들로 제주시 삼도리 무근성 1152번지에서 태어났다.

1938년 제주농업학교 수석으로 졸업하고, 본시 천재라고 일컬어 만주(滿洲)에 건너가 1942년 하얼빈 의과대학을 졸업한 데 이어 일본의 고등문관시험에 거뜬히 합격, 더욱 실력을 양성한다는 뜻에서 만주국의 고관 양성기관인 대동(大同)학원을 1943년 수료했다.

일제 말기 하얼빈시립의원 내과에서 근무하며 의대 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일본이 패전하자 귀국하여 194627세의 청년의사로서 도립 제주의원 원장에 피명(被命)을 받았다.

문종후文鍾厚1917(일제강점기)~?, 의사, 도립의원장, 제주도의원, 나사로병원 원장, 본관은 남평,

제주시 삼도동에서 문재형(文在瀅)과 이온숙(李溫淑)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초등교육을 마친 후 도일(渡日), 오사카(大阪)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日本)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1945년 해방되는 해에 일본의대를 졸업하면서 경성(京城)여자의학전문학교 김시창(金時昌)의과에 조교로 들어가 1948년까지 근무, 도립제주의원 원장(院長)으로 취임하였다.

마침 제주4·3사건이 일어나 최대의 비극에 직면하고 더구나 도립의원의 기능이 정상화될 리는 없는 상태였다.

의사들도 태반이 부족하여 급증하는 환자수요를 도저히 해결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한편 제주도의원 보궐(補闕)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 1956813제주-성안제주시 제3선거구에서 제2대 제주도의회 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도중 이를 포기하자 오라리 오라위가 포함된 선거구여서 유리한 고병효(高柄孝)가 당선되었다.

1960년부터 약 1년간 제주도립의사회장을 맡아보면서 1967년에는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사설 종합병원(綜合病院) ‘나사로병원을 신설하여 의료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1968년 카톨릭의대에서 의학박사(醫學博士) 학위를 획득, ‘나사로병원에 간호보조원 양성소를 설치하고 이를 통하여 도내 의료기관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한 것은 업적 중의 하나이다.

문징후文徵後1632(인조10)~?, 문신, 현감. 문곡성(文谷城)의 종제, 전라도 구례현감, 자는 중구仲久, 본관은 남평이며 애월읍 어음리 비면이 부면이 마을에서 문계박(文啓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문곡성(文谷城) 영후(榮後)의 종제, 자라서 조천읍 선흘리 선흘곶 낙선동에 살았다.

1664(현종5) 8월 제주 시재어사(試才御史) 윤심(尹深)이 내도, 시취할 때 종형 문영후(文榮後)와 함께 문과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하고 또 무과에 문창업(文昌業)이 합격하니 문씨 집안의 영광이라고 떠들썩했다.

더구나 문영후는 문과에 수석, 문창업은 무과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니 가문의 영예를 높이는 계기가 된 것이다.

1666년 식년문과 전시에서 병과(丙科)로 급제, 찰방·구례현감을 거쳐 제주 교수로 재임하였다.

문창래文昌來1885(고종22)~1950, 애월면장, 기미년 조선 독립 희생회 및 통아통합조합의 항일 활동.

본관은 남평, 충선공 18세손 말물파, 호 동롱(東聾), 동쪽나라 일본 일에는 귀머거리가 되겠다는 뜻으로 호를 썼다.

산북 애월리 하물에서 태어났다. 조천리 조천포 출신으로 정의현감을 역임한 김문주(金汶株)의 사위로서 민족주의자로 일관하였다.

일제강점기 초대 애월면장으로 재임하면서 일제의 침탈 야욕을 체험하던 중 19193·1 운동이 일어나자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이 되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마침 조선독립희생회에서 몰래 김창규를 보내어 최정식·조봉호와 접촉하여 독립희생회를 제주 지역에 조직해 줄 것과 회원 1인당 2원씩을 상해 임정의 군자금으로 모금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4450명으로부터 1만원을 모아 상해 임시 정부로 송금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의해 7월에 60여 명이 체포되었다.

동년 5월 문창래는 애월리 거주하는 친척지간인 문창숙(文昌淑, 애월리)에게 권유하여 독립군자금을 기탁하게 하였다.

문창래는 이런 일로 애월면장 직에서 물러나 1920년대 초 목포로 옮겨 제주 물산주식회사의 사업에 몰두하였다. 이 제주물산은 제주 출신 자본가들이 민족 자본을 축적하고자 자본금 20만 원으로 설립, 본점은 목포에 있었다.

19202월 정순각(鄭淳鈺)이 사장 직무대리로 들어온 후 공금을 횡령하여 제주인들의 민족 자본을 이루려는 꿈은 사라졌다.

192311월 사립 명신(明新)학교의 운영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제주유지자 대회를 개최, 그는 고성주(高性柱) 등과 함께 간사로 선임되어 민족교육 진흥에 기여, 이 무렵 민립 대학 설립 제주 본부의 총회에서 그는 박명효(朴明効), 홍순재(洪淳宰)와 함께 감사로 선출되었다.

후일 그는 자주 운항을 요구하는 제주 도민대회를 19284월 오사카 천왕사 공회당에서 개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문창래와 김달준(하귀)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표방 구호를 내걸고 19303월 제주통항조합 준비위원회(회장 문창래)를 조직, 421일에는 오사카 거주 제주 출신 재일교포 4500명을 조합원으로 가입하게 하여 조합비를 갹출, 또 명칭도 동아통항(東亞通航) 조합으로 개칭하고 66조합 뉴스창간호를 발행하여 도민과 일본에 있는 교포들에게 자주운항(自主運航)을 알렸다.

1930111일 교룡환(蛟龍丸)으로 출항하다가 이듬해 11월 복목환(伏木丸)으로 교체하게 되었다. 조합의 배 삯은 650전인데 비해 일본 배에서는 1250전 하던 선임을 3원으로 내려 덤핑으로, 일제의 간섭과 탄압을 받았다.

철저한 민족주의자로서 전 정의군수 장용견(張容堅)과 함께 보천교를 포교하면서 반서교(反西敎반왜식(反倭式반외세(反外勢)를 부르짖었다.

문창송文昌松1925(일제강점기)~2012, 광복회 단원, 경찰관 경위, 화북지서 주임 시에 이덕구 사살, 본관은 남평, 남제공파, 애월읍 봉성리 도노미에서 태어나 자리왓 동네에 있던 어도개량서당 졸업, 일제 말에 일군(日軍)에 징집되어 육군으로 가가와(香川縣)에서 훈련을 받아 나남(羅南) 사단에 배치됐다.

이후 남경전선 등지로 이동하던 중 일제의 패망을 예감하여 해방 직전 광복군 주녕(駐寧)부대에 입영한 후 해방이 되자 귀향하였다.

김인선(金仁善)은 광복(光復)청년회에 가입하고, 그는 이승만 노선인 독립촉성청년회(獨靑) 창립회원으로 가담했다.

미군정시에 경찰에 투신, 경위로 화북지서 주임에 재직, 194967일 선흘리 지경에서 소위 인민군사령관 이덕구(李德九, 신촌)를 사살하고 양생돌(梁生乭)을 생포하는 데 수훈을 세웠다.

당시 화북지서에는 서청(西靑) 출신 경찰 20명과 제주 출신 3명이 있었는데 무장대 고정순의 제보에 의해 경찰 단독작전에 의한 전과였다.

2연대장 함병선(咸秉善)이 찾아와 생포했으면 좋았을걸하니 문 경위는 군에서는 사살이라도 했습니까?” 응답했더니 아무 말도 없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57년 관덕정 광장에서 공비완멸(共匪完滅) 제주도민대회(대회장 박치순)를 개최, 문 경위(文 警衛)는 이때 감사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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