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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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돈,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시인

비가 촉촉이 내린 다음 날 아침 사라봉으로 차를 돌린다. 운동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도 나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마지막 남은 잎 하나가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고, 비에 젖은 벚나무 잎이 낯선 이를 반긴다. 땅에 떨어진 그 잎도 지난밤엔 나뭇가지에 달려있어 나름대로 제 몫을 다했을 것이다.

올 한 해 동안 내가 걸어온 것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드니 이내 얼굴이 붉어진다.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허송세월만한 것 같다. 돌아보면 올해는 유독 힘들게 보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올 초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한 코로나19는 아직까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모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기 마련인데 이 또한 적당하게 지나간다면야 더 없이 좋겠지만 생각처럼 그렇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속히 백신이 나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지난 봄 어느 날 사라봉 계단을 오르다가 민달팽이를 만났다. 달팽이는 힘든 기색 없이 저만의 목적지를 향해 느리지만 끈기 있게 가고 있었다. 달팽이라고 힘든 일이 없을까만 나름대로 제 몫의 역할을 하며 살아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계단을 오르면서 작년 봄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갔던 일이 떠올랐다.

갓바위는 정성껏 기도하면 소원하나는 꼭 들어준다는 바위이다. 욕심이 많아서인지 아직 그 소원은 이룬 것이 없다. 갓바위를 오르기 위해서는 1365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니 사라봉 계단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난 11월 중순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게 되어 다시 대구를 방문했다. 코로나 시국이지만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를 쓰는 등 위생규칙을 잘 지킨다면 괜찮다는 생각에서 과감히 나선 길이었다.

세미나는 오후에 잡혀 있어서 오전에 비교적 수월한 경산방면을 통해 갓바위에 다녀오기로 했다. 주차장에서 갓바위까지는 고작 30분정도 걸리지만 계단이 많아 만만히 생각해선 안 되는 곳이다.

수능 철이라 그런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갓바위를 오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 사람들 역시 소원 하나를 빌기 위해서 부지런히 계단을 타고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간직한 바람이 비록 이루지지 않을지언정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힘겹게 계단을 오르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다가 한 가지 희망을 찾았다. 힘든 것보다 쉬운 것, 어려운 것보다 편한 것만 찾는 나약한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쌀쌀한 날씨라 중간쯤에서 그만 내려갈까 하는 유혹이 나를 괴롭혔다. 어렵사리 산길을 오르는 동안 사라봉 계단에서 만난 달팽이의 삶을 생각했다. 저마다 소망을 간직하고 갓바위를 향해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나를 이끌어 정상으로 내딛게 했다.

올해도 이제 20여 일밖에 남지 않았다. 지나온 한 해를 정리하고 결산해야 할 시기이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을 달성한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게 현실이다. 나 또한 그렇지 않은 쪽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꿨던 일이 이미 물거품이 돼 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강렬한 희망의 잔을 권하고 싶다. 내년에는 꽃 같은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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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2020-12-08 13:05:25
멋진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