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설화·기록이 만나 탄생한 역사문화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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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대정현성과 남문지 설화
대정성지, 제주도기념물 제22호 …축성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
남문지 구전 설화, 군제 명부 군병도안 등 유·무형 문화 풍부
대정현성 성담.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8m 내지 3.7m이고 상부의 폭은 2.7m 내지 3.1m로, 현무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하부와 상부의 돌 크기가 거의 같게 쌓아 올렸다.
대정현성 성담.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8m 내지 3.7m이고 상부의 폭은 2.7m 내지 3.1m로, 현무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하부와 상부의 돌 크기가 거의 같게 쌓아 올렸다.

대정읍성은 1416년 대정현이 설치된 2년 뒤인 1418년 유신 현감에 의해 축조됐다.

대정현은 1864년 군으로 승격됐으나, 1880년 다시 현으로 환원됐다. 을미개혁으로 전국적으로 고을 명칭을 군으로 단일화하는 조치에 따라 1895년 또 군으로 바뀌었다.

대정현과 대정읍 사이

대정현은 전국 23부의 지방제도 하에서 제주부 대정군 우면에 소속됐으며, 1914년 제주군 대정면이 됐다. 1946년 제주도제가 실시되면서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면이 됐으며, 1956년에는 대정면이 대정읍으로 승격됐다.

대정현성의 축성과 복원 과정

제주도기념물 제22호인 대정성지는 1418(태종 18) 대정현감 유신이 왜구의 침입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읍성의 터이다. 대정고을인 보성·인성·안성 일대에 걸쳐 있는 성벽의 둘레는 약 1615m이고, 높이는 5.1m이다. 동문·서문·남문 세 개의 성문이 세워졌고, 북문도 있었으나 후에 폐쇄됐다. 문 위에는 누각이, 문 앞에는 돌하르방이 있었다.

1416년 안무사겸 목사 오식의 건의에 의해 대정현이 설치되고, 1417년 안무사 이간의 건의로 초대 대정현감인 유신이 1418년 대정현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정조 때에는 둘레 3200, 높이 174, 여첩 240, 동서남 3, 성 내외에 해자를 너비 10, 깊이 7척 규모로 파고 성 밖에는 탱자나무를 심었다. 1754년 전후해 동··남 문 앞에 돌하르방을 각 4기씩 12기를 설치했다.

1870년경 둘레 4890, 높이 174, 여첩 155개 등으로 구성된 대정성 방어를 위한 편제로 성문별로 첩장들이 배치됐다.

1910년 일제강점기 초기의 읍성 철폐령으로 훼손되기 시작해, 산업화를 거치며 성곽은 더욱 파괴돼 상부는 허물어져 본래의 높이를 보존하지 못했다.

현재 성의 일부가 복원돼 있고, 북쪽에 위치한 성은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동성에는 옹성의 하부 3~4단 정도 남아있다.

성안의 건물로는 동헌인 영안관, 윤경당, 청풍당, 향사당, 군관청, 인사청, 현창, 군기고, 기비청 등 현의 치정을 위한 관아가 있었고, 향교는 처음 성안에 있다가 1653년 단산 남쪽 밑으로 옮겨갔다.

대정현성은 방형에 가까운 직선으로 축성됐고, 성안의 도로망은 주 도로와 보조 도로를 활 모양으로 내어 지역을 분할했다. 성벽은 평지에 직선형으로 석축해 외벽은 수직에 가깝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8m 내지 3.7m이고 상부의 폭은 2.7m 내지 3.1m, 현무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하부와 상부의 돌 크기가 거의 같게 쌓아 올렸다. 격대는 6개로 성벽을 쌓은 연후에 덧붙여 쌓았다. 특히 북측 성벽은 당시의 축성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일명 해안루라고 하는 남문루는 영조때 이관 현감이 중건했고 성내에는 객사, 동헌, 향사당 등 주요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의 보성초등학교 자리가 동헌지이다. 동헌 건물은 후에 대정읍 사무소 별관으로 이설 사용했으며, 향사 건물은 무릉리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성벽 보수공사 과정에서 북성터(甕城門(옹성문)의 형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애초에는 북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곳은 비상시를 대비한 일종의 암문(暗門)으로 성벽에 누각 없이 만든 문이었을 것이다.

··남 문은 옹성과 함께 세워졌는데, 옹성은 철옹산성의 준말로 큰 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 밖에 쌓은 작은 성을 말한다.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393-1번지에 위치한 남문지와 주변 풍경.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393-1번지에 위치한 남문지와 주변 풍경.

남문지(南門池) 설화 그리고 대정군군병도안(大靜郡軍兵都案)

설화와 기록이 만나면 또 다른 역사문화가 된다. 남문지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이고, 대정군군병도안은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록물이다.

남문지(南門池) 설화

대정읍 인성리 393-1번지에 위치한 남문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대정현이 1416년 설치된 후, 외부의 침략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신 대정현감은 1418년 축성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축성 현장을 지나던 노승이 사방을 살피더니 축성 감독에게 축성 작업을 그대로 하면 백성들의 피해가 많겠소하고 한마디 남기고는 길을 떠났다. 축성을 감독하던 관리가 노승의 말을 즉시 유신 현감에게 보고하자, 현감은 그 노승을 모셔오라고 했다.

현감이 축성작업이 안전하게 마칠 수 있는 방법을 묻자 노승은 서남쪽에 위치한 모슬봉에 화기가 비치니 남문 앞에 연못을 파서 물의 힘으로 화기를 누르면 백성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게요라고 응답했다. 이에 현감은 축성 작업을 중단시키고, 연못을 파도록 하명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물길이 새로 판 연못으로 모여드니 한여름 더위도 이겨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사를 마칠 때까지 마을에는 아무런 재앙이 없었다고 전해온다.

대정군군병도안.
대정군군병도안.

대정군군병도안(大靜郡軍兵都案)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대정군군병도안은 대정군에 소속된 각종 군병들을 기록한 도안이다.

정기적으로 대정현의 각종 군병들을 조사해 소속, 성명, 나이, 주소 등을 기록한 명부인 대정군군병도안은 조선 후기 대정군의 군제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870(고종 7) 정월부터 적용된 이 도안은, 18696월 대정군에서 도안 작성을 마감하고 제주영에 접수시킨 내용을 담고 있다.

대정군군병도안에는 당시 대정군 소속의 성정군, 좌우마대, 속오군, 군수의 수졸, 차귀진의 방군과 파수, 모슬진의 방군과 파수, 봉수의 별장과 오장, 봉군, 보인, 연대의 별장과 오장, 특수지역의 파수, 교직생, 기타 사창감관 등 각종 군병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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