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반항적인 형상…고을을 지키는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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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돌하르방과 대정 탐사 6경
제주민속문화재 2호 돌하르방
읍성 지킴이·수호신적 등 역할
추사관·3의사비·대정현성 등
대정지역 유물·유적 6곳 안내
두레물 주변 전경. 도레물이라고도 불리는 두레물은 1417년 대정현 초대 현감인 유신에 의해 대정현성이 축조될 당시 주민과 군인들의 식수터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대정현성 안 유일의 우물이었다. 

제주의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하르방은 우석목·무석목·벅수머리 등으로 불리었으며, 제주목·정의현·대정현 성문 입구에 세워졌다. 석상의 형태는 대체로 벙거지형 모자,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 큼지막한 주먹코, 꼭 다문 입과 두 손을 배 위와 아래로 위엄있게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제주민속문화재 2호인 대정현성 돌하르방

돌하르방 형상은 지역적 특성을 또한 반영하고 있는데, 평균 신장은 제주목이 187, 정의현이 141, 대정현이 134이다.

제주목 돌하르방은 세련되고 권위적이며,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이며, 대정현의 돌하르방은 거칠고 반항적이며 무뚝뚝한 편이다. 제작연대는 1754(영조 30)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육지의 장승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 돌하르방은 반드시 성문 앞에 세워져 읍성 지킴이 역할, 수호신적, 경계금표적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부터 시행된 일제의 읍성 철폐령 이후 대정현 돌하르방 12기는 남문지 및 보성초등학교 부근 5, 추사관 앞 2, 동문지 1, 보성리사무소 입구 2, 서문지 1, 돗귀동산 1기로 흩어졌던 것이 2018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됐다.

대정현성의 성담은 대부분 복원됐으나 돌하르방이 지키던 성문은 복원이 돼있지 않다. ··남문을 복원해 제자리에 돌하르방을 위치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돌하르방이 제주민속문화재 제2호인 반면 제1호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동자복과 서자복이다.)

상모리 마을의 수호신 옹중석.

상모리 마을의 수호신 옹중석

지방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돌하르방과는 형상이 매우 다른 석상이 모슬포 우체국 앞에 옮겨져 있다.

이 지역에는 돌하르방 또는 옹중석으로 불리는 석상이 짝으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홀로 서 있다.

오래전 상모리와 하모리 사이는 꽤 떨어진 거리였다. 시간이 흘러 두 마을은 이웃할 정도로 커지므로 해서 경계지점이 필요했다.

그 경계지점에 기념비적이고 경계 표시적인 석상들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의 옹중석이라 한다.

다음은 모슬포 우체국 입구에 세워진 옹중석에 대한 설명문이다.

대정읍 상모리는 비교적 평탄한 곳에 마을을 이루고 있고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좌우가 에워싸여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앞이 허()하여 마을의 기운이 앞으로 나가 버린다고 하여 마을의 기()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옹중석을 세웠는데, ‘극대또는 돌하르방이라 부른다. 옹중석이 만들어진 시기는 모슬리가 상모리, 하모리로 구분될 당시인 조선 영조 25(1749)으로 보는 것이 유력한데, 하천의 북쪽인 상모리 지경에 남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었다. 옛날부터 세워져 있던 옹중석은, 일제 때 매립 또는 방치되어 후에 1기의 옹중석 머리 부분만 나뒹굴고 있었다. 그 후 누군가에 의해 머리 부분은 통통한 자연석 현무암에 올려 놓아졌고, 몸통은 1971년까지 지번 3941-7번지 근처에서 훼손되어 흙에 묻혀 있던 것을 모슬포 우체국 건물 신축 관계자들이 씻어서 세워 놓았다. 머리 없는 이 옹중석은 20년 가까이 서 있었으나, 19905월 자연석에 놓여 있던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을 맞추어 본 결과, 같은 것임이 확인되어 복원하였다. (서귀포시 대정읍)”

위의 설명문 중 옹중석에 대한 문헌 기록과 연대 표시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제주목의 돌하르방은 1754년 제작되었고, 대정현 돌하르방의 제작연도에 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곳에 세워진 석상은 제주도민속문화재 제2호인 돌하르방과는 모형이 현격히 다르다.

특이한 석상인 만큼 문화재적 가치에 적합한 언어 선택이 연구과제로 남는다.

제주추사관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2010년 건립됐다. 

대정고을 탐사 6

대정지역에서는 대정고을 답사 중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유물유적으로 다음의 6곳을 선정해 여러 곳에 안내판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정현성(제주도기념물 12)

대정현성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3읍성 중 하나로 대정현에 축성된 성곽 유적이다.

대정현성은 1418(태종 18) 대정현감 유신이 왜구의 침입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했다.

제주추사관

제주추사관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2010년 건립됐다.

3의사비

1901년에 일어난 제주민란 당시에 사회적 폐단을 시정하고자 장두(狀頭)로 나섰던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두레물

고을 안에 드레물 또는 드렁물로도 불리는 샘물이 있었다. 자연적인 절벽으로 파여 있는 샘물로서, 그 깊이가 열다섯 발의 두레박을 넣어 물을 올릴 정도였다. 이 물을 옥녀의 하문이라 불리곤 했다. 현감이 선정을 하면 물이 솟고, 악정을 펴면 물이 일시에 말라버렸다 한다.

그래서 대정고을의 지형을 옥녀탄금형 즉 모슬봉이 옥녀의 형국이고, 금산은 거문고의 형국이어서 모슬봉의 옥녀가 금산의 거문고를 타는 모습이라 한다.

도레물이라고도 불리는 두레물은 1417년 대정현 초대 현감인 유신에 의해 대정현성이 축조될 당시 주민과 군인들의 식수터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대정현성 안의 유일의 우물이었다.

동계선생유허비

동계 정온 선생은 조선 중기 제주도에 유배된 문신으로 유배 동안 주민들에게 학문과 예를 가르쳐준 공적을 기리기 위해 1668(헌종 9) 귤림서원에 배향됐다. 선생이 해배된 후 1840년 제주에 유배 온 김정희가 당시 제주목사 이원조에게 건의하여 동계의 적소가 있던 지금의 안성리에 송죽사와 유허비를 세웠다.

현재 비석은 보성초등학교로 옮겨져 있다.

대정현성의 돌하르방. 돌하르방은 반드시 성문 앞에 세워져 읍성 지킴이 역할, 수호신적, 경계금표적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하르방

제주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3읍성인 제주성, 정의성, 대정성의 성문 입구에 세워졌던 석상이다.

성안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성을 지키는 수문장으로서의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읍성 철폐령 이후 흩어져 있던 돌하르방 12는 성문 복원 없이 현재 동문지, 서문지, 남문지에 각각 4기가 이설, 정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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