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복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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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환 수필가

올 한 해도 다 가고 마는가. 오후부터는 더욱 추워진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가방 하나를 달랑 메고 집을 나섰다. 오름이나 숲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반겨주는 이름 모를 꽃들이 있어 더욱 좋다. 좀 더 추워지고 눈이 내리면, 하얀 눈을 헤집고 피어난 복수초도 볼 수 있을 터. 눈 속에서 피어난다고 설연화, 얼음을 뚫고 피어나기에 얼음새꽃이라 불리는 꽃. 꽁꽁 언 겨울 숲속에서 가장 먼저 노란 꽃을 피운다. 복수초는 제주 특산식물로 제주를 대표하는 2월의 꽃이기도 하다.

극심한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 그날따라 무척 추웠다. 평화롭고 한적한 농촌에 저벅, 저벅요란한 군화 소리.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건장한 사내 하나를 낚아채고는 포대 하나에 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순간 새까만 까마귀떼가 날아들더니 비극의 씨앗을 알리기라도 하듯 힘차게 원을 그리며 허공을 맴돌았는데, 온 세상이 뒤집기라도 할 기세였다. 겁에 질린 젊은 여자. 등짝에 매달린 어린아이 하나가 세상 모르게 곤히 자고 있었다.

별도봉 다리 아래, 정뜨르 비행장 구석 등등에 버려진 시신, 시신들.

어렵사리 내 낭군을 손수레에 실어와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그것을 보며 불안에 떨던 올망졸망한 세 아이는, 자유로운 삶을 박탈한다는 빨간 동백꽃 꽃잎 하나가 등에 붙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엄마의 서러움에 같이 서러워할 뿐이었다.

짧디짧은 겨울 햇볕을 받기 위해 종일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큰 키의 나무와 무성한 잡풀에 가려 점점 안으로만 수그러드는 몸. 잔인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열을 내어 주변의 눈과 얼음을 녹이며 꽃을 피우고, 곤충들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인가. 오목거울처럼 만든 꽃잎이 너무나 애처롭다.

보릿고개가 너무 힘들었던가 보다. 복수초는 여름이 되면 말라 죽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겨울이 오면 다시 노란 꽃을 피운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건만 뽑힌 흔적은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것인가. 슬픈 메아리가 산천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연초가 되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떡과 과일을 준비하고 노늘 당을 찾았다. 그곳에는 천년은 족히 됐을 법한 늙은 팽나무가 무리 지어 웅크리고 있었는데, 어린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사람도 먹기 귀한 시절이다. 신방이 굿을 하다 음식물을 허공으로 던지면 까마귀 떼가 새까맣게 날아들어 쪼아 먹던 광경이 나의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까마귀를 매우 터부시했다. 이른 아침 까마귀가 까악, 까악울면 서울 간 네 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하고 걱정하곤 했었다.

기일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 묘소를 찾았다. 묘비를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로워진다. 엄동설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저 여장부의 얼굴을 보라. 어린것들 키우느라 핏기 하나 없고 딱딱한 조각 같은 얼굴, 두 아이를 먼저 보내는 참척慘慽의 슬픔을 겪기도 했지만, 스스로 키워낸 자손들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저 표정. 참으로 자랑스럽고 당당한 모습이다.

멍에처럼 구부러진 등은 버거웠던 삶의 징표이던가. 자신의 운명처럼 늘 마음에 달고 살던 네 개의 짐을 편히 한번 내려놓지도 못한 채, 지금은 명도암 양지바른 곳에 고이 누워 자식들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 어머니다. '슬픈 추억'을 넘어 '영원한 행복'을 빌고 있다.

인적이 드문 저 넓은 광야, 차디찬 바람에 몸을 누이고 있으면서도 하얀 눈을 여미고 노란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는 정성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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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인 2021-01-28 10:45:56
작가님! 복수초는 일본식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방에 따라 얼음꽃, 얼음새꽃이라는 예쁜 이름이 있고, 제주에서는 '눈벨르기꽃'이라는 좋은 이름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에서 피는 꽃은 '가는 눈벨르기꽃'입니다. 다음부터는 복수초란 이름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