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도민 숙원과 제주 발전의 전환점…도제 승격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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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 제주목사로 청백리 인정
민연, 광해군 제사 거행·윤회
민우룡, 훈학 활동…제주 유람
민휘, 명환 호칭…선정 베풀어
박경훈, 광복 후 첫 도지사 역임
박계곤, ‘효·열·충’ 유명 가문
1910년대 제주도청 전경. 1946년 8월 1일 제주도의 도제실시와 개청식이 열렸고, 당시 제주도사였던 박경훈은 초대 제주도지사로 승진했다. 이 건물은 1949년 1월 화재로 소실됐다. 출처 :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민기閔璣1568(선조 1)~1641(인조 19), 문신. 제주목사. 경주부윤, 청백리, 명환, 자는 자선(子善), 호는 서한당(棲閑堂), 본관은 여흥, 군수 사용(思容)의 손자이며 정랑 여준(汝俊)의 아들로 충북 제원군 백운에서 태어났다.

1597(선조 30)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어 전적을 거쳐 특히 제주목사로 부임한 뒤에는 7개월 동안에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공역(工役)을 파하였다.

수입을 박하게 하여 지출을 절약하게 함으로써 제주도민을 숙연케 하였다.

16238, 목사 유순무(柳舜懋)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246월에 사임하고 떠났다. 재임 중 공정청렴하여 청백리로 인정되고 세상 사람들이 명환(名宦)이라 칭하였다.

민연閔埏생몰년 미상, 제주판관. 광해군 병사, 1640(인조 18) 1월에 김늠(金凜)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421월에 파직되어 떠났다.

1641(인조 19) 71일 광해군이 제주도 유배소에서 중병으로 사망, 73일 소렴(小斂)하고 4일에 입관하여 727일 관덕정에서 대제를 거행한 후 제주 삼읍을 윤회하고서 818일 제주를 떠났다.

또 제주 진공선(進貢船) 5척이 침몰되어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돼 임금은 이들의 처자를 구휼하게 하였다.

민우룡閔雨龍1732(영조 8)~1801(순조 1), 선비. 제주에서 훈학 활동. 자는 은경(殷卿), 호는 취은정(醉隱亭), 본관은 여흥, 경상북도 문경 태생으로 아버지는 민영수(閔泳洙)이고 어머니는 재령강씨(載寧康氏)이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벼슬을 했으나 6대조인 기정(起貞)에 이르러 을사사화를 만나 경상북도 문경에 내려와 살았다.

12세에 진사 최문억(崔問億)에게 글을 배웠으나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다.

나이 들어 서울로 왕래하며 실학자 신경준(申景濬)과 사귀었다.

1772(영조 48) 제주통판으로 도임하는 전우성(全宇成)을 따라 제주도를 유람하고 1776(영조 52)에는 제주향교에서 계성(啓聖)의 위패를 양무(兩撫)에 설치하는 것은 계성사의 본뜻과 다르니 바로잡을 것을 전달하고, 또 제주도의 행정을 개혁하기 위한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은일하였다.

민휘閔暉생몰년 미상, 문신. 제주목사. 명환(名宦), 대사헌, 본관은 여흥, 민형손(閔亨孫)의 아들이다.

1479(성종 10) 문과 별시에서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행정을 함에 청렴하고 검소하여 염간(廉簡)이라 칭하였다. 1498(연산군 4) 2, 정인운(鄭仁耘)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500(연산군 6) 8월에 상호군(上護軍)으로 제수되어 떠났다.

재임 중 청렴하고 공정하게 선정을 베풀어 명환(名宦)이라 칭하였다.

민휘의 시시의 제목=觀德亭 관덕정, 海國千年百萬兵오래된 바다 나라 많은 병사들/ 亭前觀德亦風情정자 앞에서 무예 겨룸 또한 멋일세!/ 山橫刀岳穿空碧한라산은 비스듬히 푸른 하늘을 뚫었고/ 泉出嘉羅徹底淸가락천에 샘이 솟아 밑이 보여 말끔하네!/ 朝暮烟中城四面사면을 두룬 성엔 아침저녁 연기가 자욱/ 古今人裏角三聲군사들 속에서는 예나 이제나 고각소리/ 將軍申令分明在장군의 엄한 명령 분명히 있어/ 誰道轅門事不平군문軍門이라 말을 하나 일은 평온치 못하네!

박경훈朴景勳1909(융희 3)~1973, 경제인. 초대 제주도지사. 호 우석(友鉐). 본관 밀양, 제주시 일도1제주 성안에서 거부 박종실(朴宗實)4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공립중학교를 거쳐 경성(京城)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 미 군정청은 19462월 그를 제주도사로 임명, 동년 7월 러치장관은 박도사(朴島司) 앞으로 도제(道制)실시를 정식으로 알리는 통고문을 보내었다. 이 통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바다멀리 떨어져 본토와 거리를 두고 있어 자연 기후풍토가 또한 판이하다. 따라서 주민의 생활과 문화가 독자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치제를 진정하여온 도민의 건의가 타당하다고 인정하여 군정장관의 직권으로 승격을 허가한다.”

194681일부터 도제(道制)로 승격되고, 도사 박경훈은 초대 제주도지사로 승진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81일 역사적인 도제실시와 개청식이 관덕정 옆 구도청(旧島廳) 자리에서 개최되었다. 도지사 박경훈은 인사말을 통해 오늘의 도제 실시는 도민 모두의 승리이며 제주 발전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전 도민은 하나로 단결하여 민생문제를 풀어 나가자고 강조하였다. 이어 스타우트 군장관은 이제 도민의 숙원이던 도승격이 실현되었으므로 주민복리와 치안확립에 모두 힘을 합쳐 달라.”고 당부하였다.

제주도는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으로 구성, 112면을 관할, 당시의 인구는 266400(114700, 151700)이고, ()의 기구는 총무국·산업국·보건후생국 등 3국을 두고 총무국에서는 서무·인사·재무·회계·소방과를, 산업국에는 농무·축정·산림·상공·수산과를, 보건후생국에는 보건·후생과를 두었다. 그는 194747일 사표를 제출, 9일 안재홍(安在鴻) 미정장관에 의해 수리되었다. 파업에 따른 책임을 지겠다는 뜻과 또 경찰 당국의 강경 진압에 항의하는 의사 표시로 사표를 내게 되었다고 밝혀졌다.

19477월 민전(民戰)에서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었다는 보도가 나가자 큰 화제를 모았으며 이 바람에 좌익분자로 몰려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 같은 해 10월 제주신보를 인수, 사장으로 취임했으나 4·3사건 직전 불온(不穩) 유인물 인쇄가 문제되어 한때 구속당했으나 무혐의 처리되었다.

박계곤朴繼崑의 삼정문三旌門(애월읍 신엄리 마을 안).

박계곤朴繼崑1675(숙종 1)~1731(영조 7), 효자. 숙종 임금의 능역(陵役)에 참가한 제주인. 조정에서 박씨 삼정문(朴氏三旌門)’이 내려졌다. 본관 밀양, 한림읍 옹포(瓮浦, 일명 독-獨浦)에서 박여한(朴麗漢)의 아들로 태어났다.

1720(숙종 46) 6월 숙종 임금이 승하하자 수년 전 제주 기민을 위해 구호곡을 보내 주신 임금의 은혜를 갚기 위해 동년 10월 능역에 참가하여 일했다. 17241월 성내에서 실화로 제주향교가 소실되어 가락천(嘉樂川) 동쪽 옛 터로 옮겨 세우게 되니 그는 쌀과 소를 내놓아 역사를 도왔다.

막내딸이 이항춘(李恒春)에게 시집가서 몇 년 만에 남편을 잃어 평생 수절하여 세인이 정절부인(貞節夫人)’이라 칭했다. 1763(영조 39) 이명운(李明運) 목사에 의해 이 사실이 보고되고 1764년에 어사 이수봉(李壽鳳)에 의해 조정에 알려졌다. 1794(정조 18) 제주순무어사 심낙수(沈樂洙)에 의해 이 사실을 알리니 손자 박중환(朴重煥)에게 벼슬을 주고 효((()으로 정표하자 박씨 삼정문(朴氏三旌門0’이 내려져 자손이 사는 애월읍 신엄리 거리에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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