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빛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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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가시밭길 걷고 걸어 한 해가 서산을 넘고 있다.

코로나19가 시공의 뼈대였다. 너나없이 생존에 허덕이며 꿈속에서도 두 다리 펼 수 없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 두기와 위생에 힘쓰며 깨금발로 백신을 고대하고 있다.

비대면의 일상이 전개되고 ‘집콕’ 생활에 길들며 재택근무가 확산하지만, 왠지 거북하다. 사람은 부대끼며 온기를 나누는 공동체의 유전자만은 버리지 못하나 보다. 새로운 것, 큰 것, 위대한 것을 향해 끝없이 질주하던 마음들이 멈춰서야 뒤돌아보는 여유를 갖는다. 시력을 상실하면 눈으로 생각하게 되듯, 소소하게 느끼던 일상의 그리움이라니.

올봄 송곳처럼 찔러대는 복통으로 병원 응급실을 찾았던 기억이 새롭다. 열이 많아 필수적으로 코로나 검사를 받으며 독실에서 이틀 지냈다. 양성으로 판정되면 음압병실이 있는 병원으로 이송된다기에 두려웠다. 난치병의 고통엔 죽음이란 의사가 치유하러 온다는 말을 떠올리며 아픔을 견뎠다. 결과는 음성이었으며, 며칠 더 장염과 폐렴 치료를 받고 퇴원할 수 있었다. 의료진이 고마웠다.

만일 내가 코로나 확진자가 되었더라면, 미지의 감염원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운명을 슬퍼했을까. ‘나의 건강의 너의 건강이고 너의 건강이 나의 건강이구나’ 하는 생각이 파닥였다. 촘촘히 얽힌 지구촌 관계망이 실감이 났다.

무시로 발표되는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는 긴 강으로 흐르고 인간의 왜소함은 깊숙이 가라앉는다. 세계 곳곳에서 건너오는 팬데믹 참상은 형언할 길이 없다. 상품처럼 포장된 주검이 차량 가득 쌓인 채 실려 가는 모습은 죽음조차 평등치 않음을 드러낸다. 그들에겐 최소한의 존엄마저 맞을 수 없는 이승이었을까.

날씨가 추워지니 마스크의 의미가 새롭다. 무더위 땐 한없이 갑갑하더니 요즘엔 찬바람 막아주는 보배다. 생명까지 지킨다 생각하면 얼마나 귀중한가. 그러고 보니 어둠과 빛처럼 양면성이 없는 게 있으랴 싶다. 만사가 의미 부여의 산물인 것을.

나의 아침은 간소한 편이다. 찐 감자나 고구마 한 개, 삶은 달걀과 바나나 하나면 된다. 요즘 시골 처남네가 한 상자 보내준 고구마를 먹으며 생각한다. 역시 흙은 어머니 마음이다. 주먹만 한 것부터 손가락 같은 것들을 차별 없이 키워냈다. 서로 볼 비비는 모습이 참 다정스럽다. 화음을 잃어버린 악다구니만 활보하는 사회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자신의 신념만을 고집하면 구도의 길도 편견의 골목에 이른다는데, 상대의 말에 귀 여는 건 예술이라 하는데.

별빛이 캐럴과 함께 코로나 우울감에 젖은 마음들을 위로하면 좋겠다. 종소리가 구석구석 스며 간절한 목소리들을 품어 가길 소망한다. 혼자 울도록 태어난 존재는 없다지 않은가. 사랑의 귀가 흐느끼는 소릴 찾아가 주저앉은 하루를 일으키고 고통의 균열을 봉합하길 비손한다.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 쌀밥을 밀쳐내며 식사하게 될 줄, 경차라도 몰며 살아가게 될 줄 상상이나 했으랴. 이런 기적을 제쳐두고 우선은 한사코 살아내야 한다. 비교하지 말고 경쟁하지 말고 더 느슨하게 살아야겠다. 꿈의 대상은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희망이 희망에 대해, 믿음이 믿음에 대해 절규하지 않기를 빌 뿐이다.

한 해의 이별이 노을빛을 넘는다. 흐르지 않는 게 무어랴. 뒷모습 슬프지만, 나는 파인 가슴에 꽃씨를 심는다.

아리랑 아리랑 노을빛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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