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무오법정사 항일 운동…조국 수호에 목숨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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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수,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박병석, 고향 추자도 어장 점거한 일제에 맞서 생존권 투쟁 전개 
 박상준, 광주 학생 항일 운동…학교 제적 후 명신서당 교편 잡아
 박세현, 한문서당 훈장…일본 타도 도민 궐기 촉구 격문 배포해
 박수룡, 애월읍 곽지리 출신으로 문과 급제…고산찰방 등 역임
2018년 10월 28일 서귀포시 중문동 일원에서 펼쳐진 제주 최초의 항일운동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100주기’를 기념하는 거리 행진. 정부는 무오법정사 항일 운동에 참여했던 박명수에게 1995년 광복절,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제주일보 자료사진
2018년 10월 28일 서귀포시 중문동 일원에서 펼쳐진 제주 최초의 항일운동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100주기’를 기념하는 거리 행진. 정부는 무오법정사 항일 운동에 참여했던 박명수에게 1995년 광복절,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박명수朴明洙:1861(철종12)~1921(일제강점기), 무오년 법정사 항일 운동. 도대장(都大將) 박명수가 좌·우대장 방동화· 강민수와 함께 저항,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선도교(仙道敎) 수령, 일명 박주석(朴周錫).

한림읍 금악리 ‘거문-오름’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목포형무소에서 복역 중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1년 7월 24일 옥사했다. 정부는 1995년 광복절,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병석朴炳碩:1899(광무3)~?, 추자도 어민의 항일 활동. 

추자면 영흥리 ‘절-구미’에서 태어나 어업에 종사했다. 당시 일제의 관리들은 민족적 차별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추자 도민의 생존권을 위협할 정도로 어장을 멋대로 차지해 불법 어로를 자행했다. 이에 격분한 박병석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일어나 일본인과 충돌, 생존권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일경이 영흥리 주민을 마구 체포했다. 1932년 7월 8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김봉수와 박병석은 소위 소요죄(搔擾罪)로 징역 7월, 또 나머지 11명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박상준朴相俊:1911(일제강점기)~1986, 목포상업학교의 항일 활동, 노형동 ‘마름’ 월랑(月郞) 마을의 명신서당(明新書堂·일명 빌렛학교) 교사, 조국이 광복되자 식량영단(營團)·제주 농산주식회사 상무이사를 역임, 본관은 밀양.

박두옥(朴斗玉)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제주시 도두리 ‘도도릿-개’에서 태어났다. 

그가 목포공립상업학교에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대대적인 항일 학생운동이 전개됐다. 

광주 학생들의 항일 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동년 11월 16일 목포 이광우(李光雨)의 집에서 학우들과 함께 목포상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을 규합해 동맹휴학을 결행, 항일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런 일로 감정이 폭발한 한국 학생들은 ‘총독부 폭압 정치 절대 반대’와 ‘치안유지법 즉시 철폐’ 그리고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 등의 큰 깃발을 제작, 1929년 11월 19일 격문 수천 매를 인쇄해 동일 오후 1시경 수업 도중 목포 역전까지 시가 행진을 하며, 격문을 살포하고 미리 만든 깃발을 흔들면서 시위를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됐다.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신병 때문에 요양했다. 

앞서 항일 학생운동으로 졸업 1년 4개월을 남겨두고 제적당하자 늘 당국의 감시와 미행이 뒤따랐다.

공무원도 될 수 없는 신분이라 신부 이선출(李善出)을 맞이해 서당의 교사로 즐거움을 보냈던 것이다. 서당 교사는 마을에서 초빙하면 누구든 할 수 있었다. 

1986년 4월 1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손자 집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박세현朴世賢:한문서당 훈장 항일 활동, 일본을 타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 전 도민들의 궐기를 촉구하게 하는 격문 작성, 다중(多衆)이 볼 수 있는 장소에 붙이다가 발각돼 체포.

1919년 10월 5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박세현(朴世賢)과 김무석(金武錫)이 징역 3년을, 또 조무빈(趙武彬)과 신계선(愼啓善)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6월을 각각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본시 전남 장흥(長興군) 보성리에 살았는데 일찍이 한경면 저지 ‘닥-루’로 이적하면서 마동산(馬童山) 한문 서당 훈장으로서 국권 회복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한경면 저지리의 서당 훈장 박세현(39·전남 장흥)과 낙천리 ‘섯-새미’의 훈장 김여석(27·낙천)·조무빈(33·낙천), 또 신촌리 ‘숙군’의 훈장 신계선(45·신촌) 등은 의기투합해 항일의거의 고사(告祀)라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을 거행한 후 거사를 감행했다.

문신 박수룡, 무신 김기현, 서예가 박계첨 등이 시와 시조를 읊었던 곽지 ‘답단이-못’의 나무그늘.
문신 박수룡, 무신 김기현, 서예가 박계첨 등이 시와 시조를 읊었던 곽지 ‘답단이-못’의 나무그늘.

▲박수룡朴秀龍:1829(순조29)~1861(철종12), 문신, 관직은 함경도 안변(安邊)의 고산찰방(高山察訪)과 사헌부 장령, 자 우공(雨公), 본관 밀양, ‘탐라인물고’에는 본관이 무안(務安)으로 기록.

애월읍 곽지리 ‘답단이’에서 박사범(朴師範)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4년(철종5) 제주 문과별시를 실시, 시제(試題)는 ‘이궐포귤유부(以厥包橘柚賦)’로서 김명악(金命岳‘납읍), 오승현(吳承鉉·정의) 등 3명이 급제하고 무과에는 이언길(李彦吉·옹포) 등 9명이 급제했다. 

영상 김좌근(金佐根)이 제주 유생에게 별시(別試)를 실시하도록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예랑 김관섭(金觀燮)에게 시제를 보내어 제주목사 목인배(睦仁培)의 관장 하에 시취, 3명이 합격해 전시에 직부하도록 하니 1855년 문과별시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관직은 함경도 안변(安邊)의 고산찰방(高山察訪)을 시작으로 양현고직장·사헌부장령·성균관사예(司藝)·춘추관기사관 등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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