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사의 발자취…섬의 지형·문화 화첩에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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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지영록과 탐라순력도
이익태 목사 입도 후 기행…조천관·별방 등 탐라10경 선정
이형상 목사, 제주목·대정현·정의현 순력하며 지도 만들어
역사·방어체계·풍속·자연 등 총 41면의 그림에 서문 추가
탐라순력도 대정조점.
탐라순력도 대정조점.
탐라순력도 대정양노.
탐라순력도 대정양노.
탐라순력도 모슬점부.
탐라순력도 모슬점부.

숙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야계 이익태가 저술한 지영록은, 현존하는 최고의 읍지인 이원진의 탐라지와 함께 주목을 받는 서책이다. 이러한 지영록의 가치가 인정돼 2018년 국가보물 제2002호로 지정됐다.

▲지영록(知瀛錄)에 나타난 대정현

이익태 목사는 지영록에 1694년 6월 화북포로 입도해 관덕정에서 군례를 마친 후 한라산을 등반하고, 동으로 순력을 떠나 정의·대정을 거쳐 제주영에 들어오면서 경승, 사냥, 방호시설 점검 등 보고 느낀 것을 시문을 곁들여 기록했다. 순력했던 곳 중 탐라10경을 선정하고는 그림을 그리고 서문을 지었다. 조천관, 별방, 성산, 서귀포, 백록담, 영곡, 천지연, 산방, 명월, 취병담이 그것이다. 

▲탐라순력도로 보는 대정현의 비경·비사

순력(巡歷)은 관찰사가 각 고을을 순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전라도관찰사가 매년 2차례 제주의 삼읍을 순력하는 일은 거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제주에서는 전라도관찰사의 순력 임무가 제주목사에게 위임됐다. 제주목사는 전라도관찰사를 대행해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을 순력했다. 

탐라순력도는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1702년 제주도를 순력하며 이를 그리도록 한 지도첩이다. 이형상(1653~1733)의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병와(甁窩)이다. 1723년(영조 3) 호조참의에 임명됐으나 사퇴하고 영천에 우거했다. 탐라순력도는 영천의 병와 후손이 보관하다가 제주시에서 매입해 1998년 12월부터 관리하고 있다. 탐라순력도의 크기는 가로 35㎝, 세로 55㎝이며 전체 41면으로 구성돼 있다. 이형상은 1702년 10월 29일 순력을 떠나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 순력을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의 역사·방어체계·풍속·자연 등을 화공 김남길(金南吉)로 하여금 그리도록 했다. 화첩에는 순력의 모습을 담은 그림 28면, 일상의 행사 관련 11면, 제주도 일대 지도인 한라장촉(漢拏壯囑) 1면 등 총 41면의 그림이 수록돼 있다. 41면의 그림에 자신의 서문을 추가한 다음 비단으로 싸서 꾸민 책이 바로 탐라순력도이다. 

△한라장촉(漢拏壯囑)

1702년(숙종 28) 4월 15일 제작됐다. 당시 제주도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과 주변 도서에 대한 지식을 알려 주는 그림이다. 먼저 제주도와 관련해서 삼읍의 경계가 시대에 따라 다소 변동은 있었으나, 이 그림 상으로는 제주목과 대정현이 판포, 제주목과 정의현은 용항포(龍項浦), 대정현과 정의현의 경우는 법한포와 색수의 중간 지점이 경계가 되고 있다.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위치와 9개 진의 위치 즉, 화북진·조천진·별방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명월진·애월진의 소재지를 적색으로 표시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산방배작(山房盃酌)

1702년(숙종 28) 11월 초10일에 실시했다. 산방굴에서의 배작(盃酌) 즉 술을 마시는 대작(對酌)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송악산, 형제도, 군산, 감산, 용두(龍頭) 등이 보이며, 도로와 산방연대 위치가 표시돼 있다. 사계리 포구가 흑로포(黑路浦)로 표기돼 있다.

△대정조점(大靜操點) 

1702년(숙종 28) 11월 초10일에 대정현성 성정군(城丁軍)의 군사훈련과 대정현의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객사·군기고·향청·질청(作廳)·관아·관청 등의 건물 위치와,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이 표시돼 있다. 당시 대정현의 편제는 읍내 1리, 동면(東面) 9리, 서면(西面) 2리로 모두 12리였고, 민호는 797호이며 전답은 149결이었다. 성장(城將) 2인, 치총(雉摠) 4인, 성정군 224인, 군기(軍器), 문묘의 제기·제복·서책, 목자와 보인 123명, 말 849필, 흑우 228수, 창고의 곡식 1950여 석을 점검했음을 보여준다.

△대정배전(大靜拜箋)

1702년(숙종 28) 11월 11일 대정현에서 시행된 배전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배전(拜箋)이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지방관이 그 소재지에서 임금에게 전(箋: 書面)을 올려 하례의 뜻을 표하는 의식이다. 순력 도중에 대정현에서 조정의 경사를 듣고 배전을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정조점·대정양노·대정강사의 그림과 아울러 대정현성 내의 건물 복원에 매우 유용한 그림이다. 읍내의 민가와 읍성 밖에 동성리로 추정되는 민가들이 보인다.

△대정양노(大靜養老)

1702년(숙종 28) 11월 11일 대정현에서의 노인잔치 광경을 그렸다. 당시 대정현에는 80세 이상의 노인 11인, 90세 이상의 노인 1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제주목사 순력 시에 노인잔치는 거의 관례화돼 있었다. 제주 지방의 풍속 중의 하나가 인다수고(人多壽考: 장수하는 사람이 많음)인데, 1653년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에서는 그 이유가 섬 가운데 한라산이 있어 남쪽 큰 바다의 독기는 산에 막히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기운이 더운 습기와 열기를 몰아내기 때문이라고 나와있다. 한라산 남쪽에 비해 북쪽이 더욱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정강사(大靜講射)

1702년(숙종 28) 11월 12일 대정현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는 광경을 그렸다. 대정현성 내의 건물 위치와 아울러 주변의 송악산, 형제도, 산방산, 파군산, 모슬포, 가파도, 마라도 등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파군산 뒷편에 향교의 모습이 보인다. 저별망이 저성망(貯星望), 가파도가 개파도(蓋波島), 마라도(馬羅島)가 마라도(摩羅島)로 표기돼 있다. 부기의 내용을 보면, 도훈장(都訓長)에 현감을 역임한 문영후, 각면(各面) 훈장 5인, 각면 교사장(敎射長) 5인, 강유(講儒: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42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21명의 사원(射員: 활 쏘는 사람)이 활을 쏜 것으로 추정된다.

△모슬점부(摹瑟點簿)

1702년(숙종 28) 11월 13일 모슬진 군대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이형상 목사가 직접 점검하지 않고 군관 전만호(前萬戶)인 유성서(柳星瑞)가 대신 점검하도록 했다. 대정현성에서 모슬진에 이르는 지형을 잘 보여준다. 또 무수연대(茂首烟臺: 동으로 산방연대, 서로 서림연대에 응함)와 모슬봉수(摹瑟烽燧: 남으로 저별봉수, 서로 당산봉수에 응함)의 위치와 모슬촌의 민가가 표기돼 있다. 점검 결과 모슬진의 조방장에 오세인, 방군·기병·보병이 24명이었다. 

△차귀점부(遮歸點簿)

제주목사가 직접 점검하지 않고 장부상으로만 확인한 경우를 점부라 한다. 1702년(숙종 28) 11월 13일에 차귀점부를 실시했다. 차귀진의 군사 훈련과 점검을 그렸다. 이형상 제주목사가 당시 군관으로 있는 사과(司果) 홍우성을 대신 보내 점검하도록 하고, 이형상 제주목사는 문서상으로 차귀진 조방장, 방군·기병·보병이 20명이며 그 외 군기를 점검했다. 이 그림에는 차귀진의 모습뿐만 아니라, 차귀진 소속의 당산봉수, 우두연대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모동(毛同)의 삼나무 밭과 우자장(宇字場) 목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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