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물감, 돼지 방광에서 튜브로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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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논설위원

서양미술에서 유화의 발명은 새로운 창작의 길을 열었다. 화가에게 재료는 농부로 말하면 씨앗과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이 재료의 역사는 곧 서양 문명이 이루어 놓은 발자취와 그 기록, 그리고 위대한 예술의 전승과 같은 것이다.

서양미술 회화사에서 볼 때 최초의 그림은 광물질로 그려진 쇼베 동굴벽화이다.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 태초의 인간들이 염원했던 것은 야생에서의 생존이었고, 그것을 위해 벽에다 여러 동물들을 그려 염원했던 것이다. 현존하는 미노스 궁전에서 발견된 벽화는 프레스코로 그려졌는데, 그중 돌고래 벽화가 유명하다. 프레스코는 벽화의 한 기법으로 벽에 바른 석회가 마르기 전에 물에 갠 안료를 칠하면 색이 벽에 스며들어 채색된 채 단단한 벽과 일체가 된다.

인간의 욕망은 주변 세력 간 전쟁을 벌이면서 그것을 기록하는 벽화를 남기고자 했으며, 그 기념비적인 표현 재료가 바로 모자이크였다. 모자이크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크기에 맞춰 비율을 정한 후 백색·황색·청색·적색을 어두운 것에서부터 밝은 부분까지 4단계의 명암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모자이크 벽화는 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정벌을 표현한 벽화이다.

유럽의 미술은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기독교는 4세기 이전까지 합법적인 지위를 얻지 못해 신자들은 카타콤베에서 비밀 집회를 했다. 그곳은 기독교인들의 비밀 지하 무덤으로 하층민에 의해 그곳에 벽화가 그려졌다. 4세기가 되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했고 후에 로마의 국교가 됐다. 햇빛을 본 기독교는 교회 건축 붐을 일으켰다. 교회 내부는 벽화와 모자이크로 장식했고,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는 모자이크가 줄어든 대신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리고 고딕 양식의 교회에서는 성서 삽화와 스테인드글라스가 주류를 이뤘다.

르네상스는 14세기 말 처음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즈음 미술사에서 재료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유화의 발명이었다. 유화가 발명되기 이전 프레스코 벽화는 너무 빨리 말라버려 그림을 잘 그릴 수가 없었고 수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안료에 계란 흰자를 개어 만든 템페라가 제단화에 쓰이고 있었다. 템페라는 수정할 수는 있어도 광택이 없고 뻑뻑해서 갈라지기 쉬웠다. 그러나 유화는 마르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색이 아름답고 보존이 잘 돼 질감 표현이 자유롭다.

19세기 인상주의가 등장하면서 물감을 야외로 가져가는 도구가 개발됐다. 그 전에는 물감을 돼지 방광에 넣었고 사용할 때는 방광에 구멍을 냈지만 다시 막을 방법이 없어 물감이 공기에 노출돼 금방 말라버리거나 이동 시 쉽게 터지기 일쑤였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미국인 화가 존 랜드였다. 그는 뚜껑을 돌려서 막을 수 있는 압출식 주석 튜브를 고안해냈다. 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감탄한 르노아르는 “튜브 안의 색채가 없었다면 세잔도, 모네도, 피사로도, 그리고 인상주의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많은 명화들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이다. 재료는 시대마다 그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는 발명품이고, 결국 창작은 예술가의 표현과 재료의 하모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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