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에게서 배우는 ‘공렴(公廉)’
다산에게서 배우는 ‘공렴(公廉)’
  • 제주일보
  • 승인 202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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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혜경,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논설위원

조선시대 유학자 중에 다산 정약용(1762~1836년) 만큼 자주 언급되는 이도 없다. 그 만큼 다산이 남기고 간 많은 학문적 업적과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다산은 조선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집대성한 실학자이다. 자는 미용(美鏞), 송보(頌甫), 호는 다산(茶山), 사암(俟菴), 여유당(與猶堂), 채산(菜山), 근기(近畿)로 생전에 500여 권의 경집과 문집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이를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934~1938 신조선사(新朝鮮社) 발행』이다.

필자는 20여 년 전 다산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그때 대학 내에 『여유당전서』를 읽는 모임이 있어 참석하려고 하였는데, 모임을 주도하고 계신 교수님께서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읽었으니, 『목민심서』 등을 먼저 읽고 오라고 제안을 하셔서 목민심서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목민심서』는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와 함께 조선왕조의 현실을 반영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일표이서(一表二書)라 불리는 이 저술들은 1817년에서 1822년 사이 저술한 책으로 유학의 경전인 사서육경(四書六經)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이 저술들의 핵심은 공권력의 회복과 애민(愛民)이었다.

다산이 주장하는 공권력의 회복은 권위의 상징이지, 절대왕정은 아니었다. 국왕이나 관료가 공적인 관료기구를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파악하였다. 또한 아래로는 목민(牧民)에 대한 지도를 확립하여 민본의식을 실천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주장은 목민관이 지켜야할 지침인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경세유표』, 죄수에 대해서조차 흠휼사상에 입각해 재판하도록 하는 『흠흠신서』 등을 통하여 사회를 합리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공직자의 자세가 중요하였는데, 화를 내지 말 것, 직위를 구하지 말 것, 절약할 것, 기쁜 마음으로 할 것, 배움을 중시할 것, 재난에 대비할 것, 세력자의 횡포를 막을 것, 청렴할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공렴(公廉)’이라고 볼 수 있다.

다산 스스로도 그의 공직자로서의 신념을 ‘공렴’으로 표현하였는데, 1789년 28세 대과에 급제한 다산은 공직자로서 신조를 시로 지으면서 “鈍拙難充使 公廉願效誠(둔졸난충사 공렴원효성, 무능해 임무 수행이 어렵겠지만, 공정과 청렴으로 충성을 바치겠다)”이라 적었다. 왕조시대에도 공직자의 ‘공렴’은 사회 유지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렴’이 한국사회에서 잘 실천되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독재정치 등을 거치면서 이런 좋은 사상들이 왜곡되거나 더디게 인식되어 실천되기 어려웠다. 다산이 공권력의 회복과 애민, 공렴에 대하여 이야기한 지도 200여 년이 지났다. 합리적 사회를 운영할 수 있도록 제언하는 이런 훌륭한 사상들이 우리의 현실에서 실천될 수 있었으면 한다. 올해 며칠 전 지역사회에 마지막 월급을 기부하고 퇴임하는 어느 공직자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에게서 공직자의 공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선한 영향력으로 확산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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