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겨울엔 비파꽃도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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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사시사철 꽃이 앞다퉈 핀다고 하지만, 꽃도 피는 시절이 있다. 2월 매화, 5월 장미, 6월 모란, 9월 국화…. 어느 때고,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꽃은 없다.

겨울엔 꽃을 보기 어렵다. 삭풍에 잎 진 황량한 하늘, 낙목한천(落木寒天) 서리 내린 뜰에 홀로 핀 국화를 보고,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한 이정보의 시조가 있다. 대놓고 국화가 피어 있는 경이로움을 경탄했다. 스산한 계절에 망울을 터트린 국화를 통해 사람의 높은 절개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웬만한 꽃은 서리를 맞으면 바로 이지러진다. 서리를 견디려면 강단이 있어야 한다. 시인은 그런 강골을 국화에서 발견한 것이다.

가을에 피는 꽃을 보며 옷깃을 여미게 되거늘, 하물며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도 그예 피어나는 꽃이 있다. 강풍과 폭설에도 꽃을 피운다면, 그게 보통 꽃이랴. 그런데도 이적(異蹟)처럼 개화하는 꽃이 분명 있다.

12월, 뜰 모롱이에 잔뜩 망울 맺고 있던 수선화가 꽃을 내밀기 시작한다. 차디찬 눈발에 발을 붙이고 앉아 노란 황금빛 봉오리를 눈처럼 하얀 꽃잎으로 감싼다. 수선화 향기 그득한 뜰에 내리면, 참 신기한 일이다. 조금 전 살을 에던 지독한 한기에 훈김이 감돈다. 붉은 동백은 아름다움의 절정을 치는 순간 툭툭 하얀 눈 위로 떨어지고, 수선화 향기는 겨울 한철을 싸고돈다.

제주에선 흔하나, 육지 노지에선 언감생심 볼 수 없는 환상적인 겨울 풍경이다. 갯쑤부쟁이, 해국, 감꽃, 바보꽃…. 한겨울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꽃도 없진 않다.

시골 어느 과수원 길을 돌고 나왔더니, 확 트인 시야로 펼쳐진 밭들에 겨울 속 싱그러운 푸름이 넘실거린다. 시퍼런 배추, 무, 마늘 그리고 푸른 초원을 방불케 하는 저 청보리의 결. 담벼락을 두껍게 뒤덮고 기어가는 송악 덩굴. 스치고 지나는 눈엔 그게 그거라 보이지 않는다. 멈춰 서 찬찬히 들여다봤더니, 그냥 담쟁이나 아이비하고는 다르다. 그것들이 뚝심 좋게 울담을 친친 감았다. 태풍을 견뎌내야 하고 큰물을 이겨내야 한다. 무서운 부착이다.

송악에서 눈을 떼려다 서너 걸음 앞에 낯익은 나무 한 그루가 수더분하게 서서 꽃을 달고 있었다. 울담 뒤에 기대 가지에 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는 나무, 비파. 오랜만에 호젓한 시골길에서 조우한 감회, 유별했다. ‘그래, 비파는 한겨울에 꽃을 피웠지. 그리고 둥그스럼한고 노란 열매며….’

비파가 입을 떼는 것 같았다.

“고난의 계절 겨울에 꽃을 피워 무더운 여름에 열매 맺는 내가 있으니, 절망하지 마라. 지금은 단지 겨울일 뿐이니까.”

흰빛 무채색의 소박한 꽃이다. 향기도 있기는 하나 진하거나 짙지 않다. 열매는 달걀보다 조금 작은 타원형인데, 빛이 곱고 단맛이 강해 상당히 감미롭다. 전혀 까탈스럽지 않아, 기온이 따뜻하고 토심 깊고 비옥한 곳이면 어디서나 잘 자란다. 굵직한 가지에 두툼하고 큼직한 잎이 무성해 수형이 준수하다. 마당 한구석에 다소곳이 서 있어 꾸미거나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으니, 정녕 우리 이웃의 모습 아닌가.

추수 뒤 노적가리가 들어서 있고, 뒤치다꺼리 덜된 어수선한 시골집에 저 비파나무가 서 있으면 잘 어우러질 것이다. 꽃 피는 겨울엔 농한기라 시골 사람들 눈 맞춤도 잦을 게고. 꽃 귀한 겨울, 제주의 겨울엔 비파꽃도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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