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혁 추진하다 유배…제주 향토사에 한 획 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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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안 유배길-충암 김정
성리학 연구와 시(詩)·서(書)·화(畵)에 능했던 선비
중종 14년 기묘사회로 조천포구 통해 제주 유배
기후·가옥구조·신앙 등 기록한 ‘제주풍토록’ 펴내
동문시장 남쪽에 위치한 충암 김정 적거 터.
동문시장 남쪽에 위치한 충암 김정 적거 터.

오현(五賢) 중 하나인 충암 김정(冲菴 金淨· 1486~1521)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자 문인 화가이다. 성리학 연구와 시문, 글씨, 그림에 힘써 시((()에 능했던 선비로 알려진다.

1520년 제주에 유배 온 후 제주 풍토와 물산을 자세히 기록한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과 우도 동굴을 노래한 우도가’, 노후화된 고려시대 대형 사찰인 수정사를 제대로 중수하기 바란다는 수정사중수권문등을 남겨 제주향토사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2살 과거시험에서 1등을 해 장원 급제하고, 33살엔 형조판서에 오를 정도로 엘리트였던 김정은 개혁정치를 시도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를 몰아내기 위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1520821일 제주에 유배됐다.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새 임금을 세워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명분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은 정치 개혁을 위해 명망 있는 신진 사림을 등용했다. 중종의 지지를 얻은 김정과 조광조 등 신진 사림은 이상 정치 실현을 위한 개혁을 서둘렀다.

신진 사림은 향약(鄕約)을 실시하고, 현량과를 설치해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다.

백성들은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을 환영했지만 정작 중종은 임금의 권위에 대한 압박으로 받아들여 사림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점차 중종은 사림의 급진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꼈고 이를 기회로 훈구파는 역공을 펼친다. 결국 1519(중종 14) 11월 기묘사화로 사림파들의 개혁 정치는 실패로 돌아간다.

김정은 금산으로 유배된 이후 진도를 거쳐 다시 1520(중종 15) 8월 조천포구를 통해 제주목으로 옮겨져 동문 밖 금강사 옛터에서 1년을 지내게 된다.

김정이 제주에서 쓴 유회(遺懷)라는 시에서 제주섬은 언제나 그늘져 있고, 거친 마을엔 온종일 바람만 가득이라는 표현은 유배지의 폐쇄적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제주시 구도심 중앙로변에 자리한 동문시장은 제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으로 대규모 상설시장이다.
제주시 구도심 중앙로변에 자리한 동문시장은 제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으로 대규모 상설시장이다.

제주시 동문시장 남쪽 산지천 다리 곁에 세워 진 김정의 적거 터 표지석은 그나마 충암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제주시 구도심 중앙로변에 자리한 동문시장은 제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재래시장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형성됐는데 점차 관광객이 늘어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상업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제주동문시장은 동문재래시장 동문수산시장 동문공설시장 동문시장주식회사 등 4개 상인회가 모여 풍성한 상설시장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연중무휴로 온갖 곡식과 야채, 생선, 과일, 식료품은 물론 의류, 신발까지 없는 것이 없는 제주도의 만물상 역할을 하고 있다.

올레17코스의 길목인 동문시장은 제주도 여행 중 꼭 한번 들러봐야 할 제주여행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점포는 620개로, 하루 평균 19150명이 방문한다.

김정은 제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우도를 구경하고 우도가를 짓는가 하면 이운 목사의 부탁으로 한라산기우제문을 남겼다. 또 적거지 근처에 우물을 파서 위생적인 식수를 얻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특히 1년 여 제주 유배 기간 제주의 기후·가옥 구조·풍속·신앙·민정·관원의 횡포 등을 기록한 제주풍토록을 펴냈다. 이 책은 제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펴낸 문헌 자료의 하나로 16세기 제주를 이해하는 안내서이자 제주학 연구의 필독서로 평가받는다.

또 당시 도민들에게 관혼상제 예절을 가르쳐 제주인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켰다고 한다.

때문에 짧은 유배 생활에도 불구하고 제주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오현(五賢)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한다.

김정은 금산 유배 당시 인근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잠시 만나온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빌미가 돼 사약이 내려진다. 1545(인종 1) 억울한 죄명이 특명으로 사면돼 관작이 복구되고 문간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제주에서는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578년 조인후 판관이 가락천 동쪽 적거지에 묘를 세웠는데 이것이 귤림서원(橘林書院)으로 발전된다.

진주리 기자 bloom@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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