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영창대군 처형 비판…10년간 섬에 격리된 동계 정온
(5)영창대군 처형 비판…10년간 섬에 격리된 동계 정온
  • 고시연 기자
  • 승인 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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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으로 유배 풀리며 요직 등용…귤림서원 배향
제주목사 이원조 1842년 동문 밖에 유허비 건립
옛 대정현 객사가 있던 보성초등학교 일대.
옛 대정현 객사가 있던 보성초등학교 일대.

동계 정온(1569~1641)은 조선 중기 제주도에 유배된 문신으로 덕변록망북두시’ ‘망백운가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했고 절개와 충절이 높은 선비로 평가된다. 그는 유배 중에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주 사람들에게도 열정적으로 글을 가르쳤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는 정온을 제주 오현 중 한사람으로 추앙했다.

정온의 본관은 초계이며 자는 휘원이고 호는 동계다. 정온의 부친은 진사 정유명으로 그는 어려서 부친에게 글공부를 익혔다.

20세 이전부터 석곡 성팽년의 문하에 출입하던 정온은 이후 정인홍에게 나아가 사제의 연을 맺고, 동시에 남명 조식의 문하에도 입문한다.

정온이 24세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정인홍, 김면을 비롯한 남명 문하의 학인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 정온 역시 부친과 함께 의병장 김면의 막하에서 활동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전쟁 때문에 무너진 강상질서를 회복하고 사람들에게 의()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차 16082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게 된다. 이로써 정인홍, 이이첨 등은 죄인의 처지에서 공신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바야흐로 대북파의 시대가 열린다.

정온은 공신이자 대북파의 실세가 된 스승 정인홍에게 아부하는 자들이 밀려드는 것을 우려하고, 동시에 스승을 통해 붕당의 폐단이 제거되기를 바랐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정온 역시 본격적으로 출사하게 돼 1610(광해군 2)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해 정언 등을 역임하다가 1614년 부사직으로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지적한다.

보통 갑인봉사라고 불리는 정온의 상소는 조정 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광해군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북파들은 정온의 상소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한다. 그들은 영창대군은 난신적자이므로 누구나 죽일 수 있다. 정온은 정인홍에게 배웠지만 정인홍의 도의는 배우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정온을 유배시키라고 촉구한다.

전반적인 조정의 분위기가 정온을 극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때 영의정 이원익 등의 비호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돼 16148월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됐고 인조반정까지 10년을 지낸다.

보성초등학교 내에 있는 정온 유허비.
보성초등학교 내에 있는 정온 유허비.

정온은 1614년 유배형에 처해진 이후 1623년 인조반정 직후 풀려날 때까지 제주도 대정현 동문 안에 위리안치 생활을 한다.

위리안치는 가극안치라고 하며 중죄인에게 내려졌다.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불을 쌓고 그 안에 유배인을 유폐시킴으로써 중연금 상태를 내외에 상징하는 조치였다. 이는 가시울타리로 쓰였던 탱자나무의 서식지가 전라도 연안과 제주도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주로 취해졌던 형벌이다.

정온의 유배생활에 대해서는 대정현 동문 안에 위리된 내력을 적은 기문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정온은 자신의 유배지 제주도 대정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한라산 한 줄기가 남쪽으로 1백여 리를 뻗어가서 둘로 나뉘어 동서의 양 산록이 되었는데 동쪽에는 산방악과 파고미악이 있고, 서쪽에는 가시악과 모슬포악이 있다. 곧장 남쪽으로 가서 바다에 이르면 송악산, 가파도, 마라도가 늘어서 있는데 모두 우뚝 솟아 매우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파고가 용의 형상이라면 가시는 호랑이 형상이다. 황모가 들에 가득하고 바다에서 10리쯤 떨어진 거리에 외딴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대정현이다.’

정온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석방돼 헌납에 등용된다. 이어 사간과 이조참의, 대사간, 그리고 경상도관찰사와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사직하고 경남 거창으로 낙향해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숨을 거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됐고 그가 보여준 애국우국의 충정 때문에 김상헌과 함께 1669(현종 10)에 제주도 귤림서원에 배향된다. 특히 정온의 서원 배향은 단순한 배향 유현이라는 상징적인 것만이 아니라 배향을 통해 남명학파의 유서를 제주도에 남길 수 있었던 교육사상사적인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주목사 이원조는 1842(헌종 8)에 대정현성 동문 밖에 정온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정온 유허비를 세웠다. 비석은 이후 1963년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지금의 보성초등학교는 옛 대정현의 객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보성초등학교에는 재일동포 등의 선행을 적은 20여 기의 비석들이 전시되고 있다.

한편 1895년 제주목이 제주부()가 되자 대정현은 대정군이 됐고, 1914년 대정군은 폐지돼 제주군에 통합됐다. 대정현의 군사·행정·경제의 중심지였던 대정읍성은 4·3당시 크게 훼손됐다.

대정읍성은 1971년 제주도기념물 12호로 지정됐다. 성내에는 국가지정사적 487호 추사유배지와 보물 547-1호인 김정희 종가 유물 25, 과거 제주도민속자료 돌하르방 12기가 있었다. 서귀포시는 1986년부터 2001년까지 성곽 703m를 보수하고 치성 3곳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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