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의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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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폭설이 내리고 겨울비가 추적이더니 모든 게 한때라고 뜰에는 햇볕이 따사롭다.

초목들도 시련의 시간이었나 보다. 동글동글 노란 등과 빨간 등을 내걸던 관상용 가지는 생기를 잃고 줄기째 널브러져 있다. 지난가을 내 키도 안 되는 구아바 나무가 노랗게 익은 열매를 몇 줌 선물하고는, 이모작을 하려는 듯 다시 꽃피고 열매를 매달기 시작했다. 하도 신기해서 눈길이 자주 갔다. 그간 파란 열매는 익기만 하면 따먹을 만큼 커졌는데, 얼마 전 내린 눈으로 열매들이 모두 흐무러지고 말았다. 아뿔싸, 세상일이란 게 이럴까.

한파의 와중에도 앙다물고 제 길을 걷는 녀석들이 많다. 금잔옥대를 자랑하는 제주 수선화는 꽃을 피운 지 오래인데, 개량종 노란 수선화는 늦둥이처럼 이제야 기지개를 켠다. 새파란 창을 갈고 닦은 듯 흙덩이를 밀쳐내는 잎사귀와 꽃대의 모습이 힘차다. 나를 보라며 히아신스도 나지막이 잎과 꽃대를 내밀고 있다. 장수매 모과나무 등나무 들은 걸음이 잰가 보다. 눈을 뜨려고 강아지가 꼼지락거리는 모습처럼 앙증맞게 움을 틔운다.

생명체는 피고 지고, 나고 죽는 순환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자연이 겨울을 지나듯 내 생도 겨울을 걷는다. ‘나이 들면 여기저기 아픈 게 당연하지’ 하고 머릿속에 앉았던 말이 가슴으로 내리면 왠지 서글프다. 탈 난 곳을 기계 부품처럼 교체할 수 있다면 그대로 사용할 게 있으랴 싶다.

소통의 뼈대는 언어일 터, 상실되는 청력은 나를 점점 우울하게 한다. 다시 이비인후과를 찾아 청력 검사를 했다. 단어 인지도는 70%쯤이고 고주파 음역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으면 상태는 더 빠르게 나빠질 거란 조언에 귀걸이형 보청기를 샀다. 못 듣던 작은 소리도 들리지만, 기계음으로 다소 낯설다. 변형된 목소리라도 알아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열 마디 중에 세 마디는 놓칠 운명이지만 이 정도라도 유지되길 바랄 뿐이다.

보청기의 성능을 알아볼 겸 미국에 있는 공장에 파견되어 땀 흘리는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들이 던진 말에 콧등이 시큰했다.

“아버지, 저는 이틀 밤낮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런 정도로 노력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끝나지 않는 코로나 재앙은 어디서든 생존을 위협한다.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애쓰는 사연들이 눈물겹다. 자신의 저울로 세상을 달기 마련이어서, 감염병이 퇴치되더라도 시련은 끊임없이 다가올 것이다. 사노라면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하고 속울음이 깊겠고, 대물림된 빈곤을 떨치려고 바둥거리다 한세상 끝나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가여운 삶을 스스로 쓰다듬을 수 있길 빌어 본다.

요즘엔 허리통증이 성가시다. 의자를 바꿔볼 요량으로 판매점을 찾았다. 매장 한쪽엔 신제품이, 또 한쪽엔 중고품이 가득 놓여 있었다. 허리뼈를 잘 받쳐줄 의자를 골랐다. 에스 라인이 도드라진 널빤지 중고 의자를 값싸게 데려왔다. 그것으로 허리통증이 해결되진 않겠지만 기분은 좀 나아졌다.

고가품이면 어떻고 싸구려 중고면 어떠랴, 내 몸에 맞으면 되는 것을.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능력껏 경작하노라면 걸맞은 꿈이 영글 것이다.

햇살이 맑다. 교감의 눈길을 보내니 먹구름 지나간 창공이 더욱 푸르다. 지금 안 보이지만 하늘 깊숙이 별들도 박혀 있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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