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무인도 매입해 교육 자산 확보·제주 어업권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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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택, 광주고법 판사 출신…목포 등 호남 일대서 변호사 활동
 박천석, 일제강점기 추자도서 불법 어로 자행하던 일본에 저항
 박철규,  추자 해녀들에 ‘사수도’ 입어권 주고 육성회 기금 받아
 박충훈,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 사임으로 권한대행직 수행
 박치순, 신명사숙 교사…1955년 국민회 제주본부 위원장 선출
제주시 추자면 예초리 소재 무인도인 ‘사수도’ 전경. 추자교 교장이었던 박철규는 추자교육성회를 통해 이 섬의 매입을 추진, 1972년 4월 17일 등기권리증을 받았다. 추자교육성회는 대서리, 영흥리 어촌계 해녀들에게 사수도 입어권을 주고 소득의 일부를 육성회 기금으로 기탁하게 했다. 연합뉴스
제주시 추자면 예초리 소재 무인도인 ‘사수도’ 전경. 추자교 교장이었던 박철규는 추자교육성회를 통해 이 섬의 매입을 추진, 1972년 4월 17일 등기권리증을 받았다. 추자교육성회는 대서리, 영흥리 어촌계 해녀들에게 사수도 입어권을 주고 소득의 일부를 육성회 기금으로 기탁하게 했다. <연합뉴스>

▲박창택朴昌澤:1910(융희4)~?, 광주지법 목포지원장, 변호사, 북제주군수 박명효(朴明效)의 장남.

아들 박영수(朴英洙)도 사법고시에 합격해 서울지검 차장검사로 부업(父業)을 잇고 있다. 박영수는 중앙에서 특검(特檢)부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제주시 ‘제주-성안’ 남문로 서편 제주도립병원 바로 동쪽에서 태어났다. 1928년 일본 교토 ‘경도’ 남양중학교를 졸업, 1948년 간이법원판사 임용자격 특별시험에 합격했다. 

광주고법 판사로 시작해 1971년 광주지법 목포지원 원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목포와 호남 일대에서 변호사 영업에 종사했다. 

▲박천석朴千石:1886(고종23)~?, 추자도 어민의 항일 활동. 

추자면 대서리 ‘당-그미’에서 태어나 어업에 종사했다. 일본 어부들이 근대화된 어선과 어구에 의해 어획물을 남획했다. 또 일제의 관리들과 일본 거류민(居留民)들과 결탁, 민족적 차별을 할 뿐 아니라 추자 도민의 생존권을 위협할 정도로 불법 어로를 자행했다. 이에 저항한 박천석 등 11명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박철규朴哲奎:1917(일제강점기)~1983, 초등 교육자. 

대한교육연합회 중앙본부 부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제주의 무인도인 사수도(泗水島)를 제주 소속으로 지켜준 의인(義人)이다. 추자도민들은 그의 공로를 기려 1994년 3월 추자교 졸업생들과 힘을 모아 ‘교장 박철규선생송덕비’를 교정에 세웠다. 

그는 추자면 대서리 ‘당-그미’에서 박병권(朴炳權)과 김막동(金莫同)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해 초등교육에 투신, 광복 후 추자교, 광양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67년 추자교(楸子校)육성회에서는 대서리, 영흥리의 어촌계 해녀들에게 소속 불명의 섬 사수도(泗水島) 입어권을 주고 그 소득의 일부를 육성회 기금으로 기탁하게 했다. 이 일을 추진한 사람이 당시 추자교 박철규 교장이다. 그의 애향심과 애교심에서 우러난 공익 사업이었다. 

본시 이 사수도는 지목(地目)이 임야로 된 1만 900여 평의 섬이었다. 일제에 의해서 세부측량(細部測量)을 처음 실시하고 나서 1919년 7월 10일 추자면 예초리 308번지 김유홍(金裕洪)의 소유로 등기가 확정됐다. 한편 이 섬은 전라남도에서는 완도군 소안도(所安島) 소속 장수도(障水島)로 기재돼 있어 이중으로 된 문제의 땅이었다. 

그후 어떤 이유인지 1930년 4월 11일자로 추자면 대서리 4번지의 일본인 다나카(田中 斗)의 소유로 등기됐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자 동년 12월 10일에 대한민국의 소유권으로 귀속됐다. 

1961년 박교장은 흑송 1000본(本)을, 또 1962년에 흑송 1000본을 식재했다. 박교장은 제주세무서장 전상범(全尙範)과 합의해 이 섬(국유지)을 7만 3500원에 매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법원으로부터 추자교 육성회장 박병술 명의로 1972년 4월 17일 등기권리증을 받았다. 

이 사수도는 완도군 소안도 남쪽에서 16㎞ 떨어진 지점이고 추자군도(楸子群島)에서는 동쪽에서 24㎞ 떨어진 지점이며 제주항에서는 45㎞ 떨어져 있는 무인도이다. 이 섬은 1979년 내무부의 도서 등록지침에 의해 전남 완도군 소앙면 당사리 산 26번지의 임야로 등기됐다. 또 제주도에서는 추자면 대서리 121번지 임야로 등기돼 있어 최근 양도(兩道)간의 소송 문제로 비화되기까지 했다. 

어떻든 이 국유지를 교육용 재산으로 확보하기 위해 헌신하고 권리증까지 받아낸 것은 박철규 교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제주의 어업권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한 그의 공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박충훈朴忠勳:1919(일제강점기)~2001, 행정가,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미군 헌병사령부 통역, 본관 밀양, 호 이당(貳堂). 

제주시 일도동 ‘제주-성안’에서 아버지 박종실(朴宗實)과 어머니 진주강씨 사이의 4남 1녀 중 4남이다. 

한편, 미(美) 트루먼대통령이 서명한 훈장증서와 함께 동성훈장을 받았다. 일반참모 비서실장으로 있다가 새로 개편된 직책에 따라 공군본부 경리국장에 피명, 미군 월리엄 배브콕소령의 도움으로 경기도 관재처(管財處)로 들어갔다. 정부수립 후 초대 상공부 무역국장이 됐으니 약관 29세로 최연소 이사관(理事官)이 돼 화려한 출발을 했다. 그 바람에 국방부 경리국장이란 중책을 맡게 되고, 5·16 사흘 전에 10년 몸담았던 공군소장에서 예편, 상공부 사무차관으로 발탁된 것은 하나의 행운이었다.

4·19 이후 태완선(太完善) 상공부장관 밑에서 차관을 맡게 되었는데 태장관은 광공업 분야에 밝았지만 상역(商易) 계통이 생소했는데 박충훈은 초대 무역국장과 상역국장 지냈기에 사무차관에 앉힌 것이다. 그 덕으로 상공부나 기획원(企劃院) 재직 시에 큰 도움을 받았다. 

상공장관에서 물러난지 아홉 달 만인 1964년 5월 다시 상공장관에 다시 기용됐다. 

1967년 10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영전, 1년 8개월간 경제총수(經濟總帥)로 활약했다. 이후 산업개발연구소 회장, 한국무역협회장, 한국과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재야에 머물다가 신군부가 헌정(憲政) 장악을 시도하던 1980년 5월 역사의 전면으로 재등장한다. 신현확 국무총리 후임이다. 그러나 국회가 해산상태였기에 국회 동의를 받지 못해 ‘서리(署理)’라는 꼬리를 떼지 못했다. 

동년 8월 16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사임함에 따라 그는 헌법 제48조에 의거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정부를 인계받았다. 국가 원수의 공백에서 오는 혼란과 국가 기능의 정체를 막는 일이 급선무였다. 권한대행은 취임 12일 만에 끝났다. 

1968년 4월 미국 일리노이스 웨슬리안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또 1993년 제주대학 개교 41주년 기념을 기해서 김형옥(金瀅玉)총장으로부터 명예 경영학박사를 제1호로 받았다. 

박치순이 살았던 자택 터(칠성로 동쪽 남향).
박치순이 살았던 자택 터(칠성로 동쪽 남향).

▲박치순朴致順:1890(고종27)~?, 우파(右派)의 원로, 광복 후에 국민회 제주도본부 위원장에 선출, 1956년 오현고 강당에서 ‘제주도제폐지 반대 대책위원회’ 위원장에 뽑혀 동 8월 10일 궐기대회 개최, 본관 밀양. 

1914년인 15세까지 대학(大學), 중용(中庸), 서전(書傳) 등을 탐독해 지금의 신성유치원 자리에 있던 ‘사범(師範)강습소’에 입학했다. 이 강습소를 거치면 훈도(訓導)의 자격을 인정해 교사로 일하게 됐다. 이후 1918년 향리의 신명사숙(新明私塾·개량서당)에서 4년 동안 교편을 잡고 애월면 회계원(會計員)으로 전직했다.

1955년 4월 20일 국민회 제주도본부에서 연차대회를 열어 위원장에 박치순, 부위원장에 강삼정(康三正)과 강필생(姜必生)을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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