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기간 훈학과 학문에 열중…현인으로 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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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백산 이세번·동계 정온
백산 이세번, 기묘사화 연루
1520년부터 7년 동안 유배
지방유생들 훈학하며 생활
후손 제주 정착…집성 이뤄
오현으로 추앙된 동계 정온
10년 동안 다수의 시 남겨
옛 대정현 객사 자리에 세워진 보성초등학교 전경. 제주로 유배 온 동계 정온은 대정현 객사 동쪽 민가에 거주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옛 대정현 객사 자리에 세워진 보성초등학교 전경. 제주로 유배 온 동계 정온은 대정현 객사 동쪽 민가에 거주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대정현은 제주목과 함께 유배인이 가장 많이 배정된 곳이었다. 이곳은 제주에서도 땅이 척박하여 생활 형편이 피폐했던 곳이었다.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

고부이씨 제주 입도조는 이세번(1482~1526)이다. 백산 이세번은 조광조와 함께 조선 5현 중 한 사람인 김굉필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조광조가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실시한 현량과에 천거됐다.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김정 등 여러 선비들이 투옥되거나 유배되자, 의금부도사로 있던 이세번은, 성균관 유생들과 영의정 정광필 등과 함께 그들의 무죄를 탄원했다. 이로 인해 조광조 일당으로 몰리면서 1520년(중종 15) 대정현으로 유배됐다. 

유배의 길목인 화북포와 조천포구 대신, 풍랑 때문에 대정현의 신도포구로 들어와 대정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세번은 지방유생들을 훈학하면서 유배의 나날을 보냈는데, 적거 7년 동안 길러낸 많은 제자들이 후일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다. 

이세번이 병에 들자, 제자들이 이를 가족에게 알렸다. 그러자 부인 석씨와 두 아들이 간호차 제주도에 왔고, 그가 죽자 가족들도 제주도에 정착했다. 이렇게 해서 이세번의 후손들이 오늘날 대정지역의 고부이씨 집성을 이루게 되었다. 

인종대에 들어 이세번은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복권되고, 특히 사마시에 합격한 아들 이충현이 제주(향교)교수로 천거된 이후, 후손들은 대대로 대정향교의 훈도를 역임했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의 묘.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의 묘.

이세번의 묘는 한경면 고산리에 있다. 고부에 살던 이세번 누이의 남편 집안에서 “만력 병술(1586) 3월 15일 이세번에게 드리는 가고문”이란 제목으로 제주에 있는 이세번 가족에게 서찰을 보내기도 했다. 이세번이 제주에 유배되자 부친의 묘역과 재산관리를 매부인 김림이 했는데, 이세번이 사망한 지 60년이 지나서도 이세번 가족이 고부로 돌아오면 묘소와 땅을 돌려주겠다는 내용이다. 

1586년 제주에 유배된 이세번의 기록과 유배 이후 단절돼 버린 가족 간의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제주 유배기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아버지와 함께 참전했던 동계 정온(1569~1641)은, 1614년 광해임금의 이복 동생이자 선조의 아들인 어린 영창대군을 죽인 자를 처형하고 대군의 휘호를 회복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해 동계는 대정현에서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정온은 대북파의 핵심인물인 정인홍의 제자였지만,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폐모론에 항거해 정인홍과의 사제관계를 스스로 끊었다. 

동계 정온 문집.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동계 정온 문집.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온은 유배생활 10년 동안 지참한 수백 권의 책을 읽고 수백 편의 시를 짓기도 했다. 당시 제주에 유배온 송상인, 이익 등과 시문으로 교유하기도, 대정현감의 배려로 유배적소에 서재를 지어 대정현의 유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정온의 거처는 대정현 객사의 동쪽 민가에 위치했다. 다음은 정온이 자신의 거처를 기록한 부분이다.

“…북, 동, 남 3면은 모두 처마에 닿아서 하늘을 전혀 볼 수가 없고 서쪽에서만 볼 수 있어,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울타리 안 동쪽과 서쪽은 한 자 남짓 여유가 있고, 남쪽과 북쪽은 남쪽을 향해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서쪽의 작은 구멍은 음식을 넣기 위한 것이다.…”

그는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죄지은 자가 살기에 적합하구나’라고 탄식하고는, 별호를 고고자(鼓鼓子)라 지었다. 10년 동안의 유배기간 동안 세상과 단절된 마음을 ‘덕변록, 망북두시, 망백운기 등을 지으며 달랬다. 특히 지역주민들을 위해 글공부를 가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주선인들은 정온을 제주 오현으로 추앙했다. 1682년 귤림서원이 세워지면서 정온이 배향돼 오현의 한 분으로 모시고 있다.

고고자라는 호를 대정현 유배지에서 지은 정온은, 도성을 떠난 지 38일만에 제주에 도착했다. 정온은 1614년 8월 23일 아침 제주성을 출발해 애월포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대정현에 도착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대정현의 높은 문루였다. 문루의 단청이 희뜩희뜩 벗겨진 것으로 보아 비바람이 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찍부터 대정현은 토질병이 돌고 인심이 교활한 곳으로 소문이 났다. 죄를 지어 공노비, 충군된 자들이 주로 대정현에 배속됐다. 

대정현감 김정원은 정온에게 서실 두 칸을 만들어 주었는데 동쪽 성첩을 등진 서향집이었다. 서쪽으로는 귤밭이 있는데, 가시 울타리가 높아서 겨우 귤나무 끝만 보였다. 지붕은 빗물이 새지 않을 정도로 띠를 두껍게 쌓은 다음, 그 위에 누르듯 긴 나무들을 촘촘하게 올려놓고 굵은 새끼줄로 서로 얽어 놓았다. 바닷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지붕이 날아 갈까봐 지붕을 단속하는 것이 제주 토속이었다. 두 칸 중 북쪽 한 칸은 온돌방을 만들었고 남쪽 한 칸은 마루로 쓰도록 만들었다. 아침이면 시시각각으로 색이 변하는 운무의 한라산이 신기해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1623년 3월 14일 인목대비에 의해 광해임금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했다. 인조반정은 3월 13일 서인 일파가 주도한 무력 쿠데타였다. 약 1000명의 병력으로 별 저항 없이 광해임금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광해와 아들이 반정군에 체포되면서 광해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곧바로 덕수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가 서궁에서 대비로 복귀되자마자, 옥새를 받은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했다. 1623년 3월 25일 벼슬을 통보하러 온 선전관이 정온에게, 반정의 거사를 말하고는 적소에서 나오라고 청해도 임금의 전지가 올때까지 있다가, 4월 1일 스스로 우물 같은 집이라고 불렀던 가시울타리를 나왔다. 

정온은 유배지에서 제주 여인을 만나 아들 하나를 얻기도 했다. 제주의 부인과 어린 아들 창근이를 남겨두고 동계는 한양으로 돌아갔다. 

정온은 유배기간 동안 대정의 주민들에게 어른·아이의 구별과 상·하의 예의를 가르쳤고 또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양식이 부족한 것을 충당하기 위해 하인으로 하여금 거친 밭을 일구게 하고 품을 팔게 했다. 또 사냥만 일삼는 대정의 백성들에게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쳐 주어 그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정온이 10년 유배가 풀려 돌아가는 날 대정의 백성들은 친척이 떠나는 것처럼 안타까워 대정현 경계까지 따라와 눈물로 전송했다고 전한다. 

정온은 대정에 관한 시를 많이 지었다. ‘대정현(大靜縣)·송악의 저녁비·한라산의 아침 구름’등 유배지 대정에서의 심경을 묘사한 시가 많다. 그중 다음에 소개하는 ‘가난한 여인의 노래(貧女呤)’라는 특이한 시가 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제주여인의 일상생활을 그린 것으로 보아 유배지에서 함께 살았던 측실(첩)을 표현한 것 같다.

縞衣貧女不爲容(호의빈여부위용: 흰옷 입은 가난한 여인 모습이 말이 아닌데)

燈下持針事補繨(등하지침사보달: 등불 아래 바느질로 옷을 꿰맨다)

夜久假眠衣不解(야구가면의불해: 밤 깊도록 졸면서 옷도 풀지 못하고)

明朝貸栗又孤舂(명조대율우고용: 아침이면 좁쌀을 꾸어다 또 방아를 찧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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