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일제 침탈에 맞서 무장 투쟁 이끈 법정사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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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승, 일본에서 문단 등단
 박태룡, 고향에 거액 희사해
 박태준, 서예가…국전 초대작가
 박행신, 제주대 생물학 교수
 박희순, 한문서당 개설·훈학
 방동화,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제주항일기념관 전경. 기념관에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 제주지역 항일독립운동사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방동화는 1918년 10월 일어난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제주항일기념관 전경. 기념관에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 제주지역 항일독립운동사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방동화는 1918년 10월 일어난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박태승朴太昇:1914(일제강점기)~?, 애월우체국장 박태후(朴泰厚)의 아우, 도일(渡日)해 다니던 대학을 중퇴, 일본인 부인은 ‘야마모도-사도코’, 재일본 문단(文壇)의 작가, 본관은 밀양, 규정(糾正)공파 27세손. 

박준경(朴準卿)의 둘째아들로 애월리 ‘하-물’에서 태어났다. 

1927년 ‘이히츠카-고지로’ 교장 때에 애월초등학교를 제3회로 졸업해서, 숙부 박기경(朴己卿)의 아들로 입양됐다. 

일본인 부인은 ‘야마모도-사도코’이다. 일본에서 문단에 등단한 작가로 그의 문장력에 반한 일본 여인과 인연이 닿아 결혼, 생활에 여유가 있어 오로지 문학 활동에 몰두할 수 있어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병몰하자 서적과 원고들은 없어졌고 일본에 사는 조카 박정희(朴貞姬)가 작품 목록(目錄)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박태룡朴泰龍:1921(일제강점기)~2010, 교포사업가, 본관은 밀양, 규정(糾正)공파 27세손, 애월읍 애월리 ‘하-물’에서 박대경(朴大卿)의 큰아들, 1933년 ‘세라데츠오’ 교장의 영향을 받아 애월국민학교를 제9회로 졸업했다.

도일(渡日), 일본인 부인 이노우에(1928~?), 박태룡은 일본에서 재력을 크게 이루자 선친은 이에 감복해 애월중학교에 부지(敷地) 1544평을 희사해 그의 공덕비가 교정에 세워졌다. 

1960년대 말경 향리의 전기가설 사업에 일금 50만원을 희사, 애월 출신 교포 100명 중 최고액을 희사했다. 

모친은 장몽규(張夢奎)의 딸인데 장군생(張君生·1898~1982)과의 사이에 태룡(泰龍·애월교 9회), 태휴(泰休·애월교 13회), 태희(泰喜·애월교 17회) 등 3형제를 낳았다. 

그들은 모두 도일(渡日)해 훌륭하게 사업을 이룩했다. 

일본인으로 귀화(歸化)해 요코하마 <橫濱)에서 90세로 타계, 그의 활동과 일본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인에 의해서 사회장(社會葬)을 엄수했다. 

▲박태준朴泰俊:1926(일제강점기)~?, 서예가, 본관 아산. 아호는 해정(海丁), 유전(有田), 

일본 오사카(大阪)시립미술학과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하고 제주도교원양성소 수료를 수료했다. 

오현고 교사, 동덕(同德)여대 강사, 국전(國展) 초대작가, 국전심사위원, 국전운영위원장, 서울서예대전 운영위원장, 한국서예가협회 부회장, 예술원상 심사위원, 현대미술관 초대작가, 서울 상균회(尙筠會) 고문, 제주 정연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박행신朴行信:1936(일제강점기)~?, 생물학 교수(敎授), 이학박사, 본관은 밀양.

한경면 신창리 ‘새-두미’에서 태어났다.

 제주농고, 경희대, 경희대대학원에서 이학(理學)박사 학위 취득했다. 

제주대학교 교수로 교육대학원장, 제주도교육위원회 위원, 제주도종합개발계획 용역(用役)단장, 제주도환경보전자문위 부위원장, 제주대학교 교수협의회장, 한국조류(韓國鳥類)학회장과 녹색(綠色)비전 제주시21협의회장, 자연친화적 삭도(索道)설치추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박희순朴熙淳:1864(고종1)~1923(일제강점기), 서당 훈장, 자는 현녀(賢汝), 호는 미암(美庵), 본관은 밀양. 

남원읍 위미리 ‘뙤미’에서 태어나 향리에 한문서당을 개설, 평생 훈학에 종사했다. 

미암이 사후 18년이 지나서 1941년 문하생들이 ‘박희순공적비’를 세웠으니 이 일을 주관한 이는 고창근(高彰根)이고 비문은 오인성(吳仁聖)이 지었다. 이 비석은 인명사숙(仁明私塾) 구내에 세웠는데 후일 충혼묘지 안으로 옮겨졌다.

▲방동화房東華:1887(고종27)~1970, 일명 방하룡(房河龍), 스님, 법정사(法井寺)의 주지, 무오법정사의 항일 운동, 봉기군의 좌대장(左大將). 본관은 남양.

방우필(房佑弼)의 아들로 산남 중문면 대포리 ‘큰-개’에서 태어났다. 

1970년 12월 28일 서귀포시 회수(廻水)리 ‘도래-물’에서 사망, 정부에서는 고인이 독립 운동에 헌신한 공훈을 기려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에 앞서 그는 1897년부터 10년 동안에 걸쳐 중문면 하원리의 훈장 김성균(金聖均)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본시 불교에 뜻을 두어 1913년 4월 초파일에 경북 경주군 기림사(祇林寺)에서 득도(得度), 이어 경북 문경군 대승사(大乘寺)에서 김혜옹(金慧翁) 스님으로부터 사미과(沙彌科) 초등과를 수업했고, 1915년 기림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1914년 제주도로 들어온 김연일은 중문면에 있는 법정사(法井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항상 교도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1918년 당시 법정사에는 김연일(金蓮日), 정구용(鄭九龍), 장임호(張林虎) 등 7명이 입도, 법정사에 체재하고, 또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姜昌奎)와 방동화(房東華)가 함께 하면서 한층 세력이 강화됐다.

김연일과 함께 하는 항일 세력은 1918년 9월 19일(음 8월 15일) 법정사에서 행해지는 불교 의식인 우란분제(盂蘭盆祭)에 참석한 남녀 교도 30여 명에게 저항 의지를 밝혔다. 

일제 축출과 국권 회복이란 양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들을 몰아낸다는 구체적인 방침을 설정해 제시했다.

동 10월 5일 장정 33명을 법정사에 소집시켜 군대 조직으로 편성한 후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선포하고 박명수를 도대장(都大將), 방동화와 강민수를 좌·우대장, 또 양남구(梁南球)를 중구대장, 김삼만(金三萬)을 후군대장으로, 장임호를 모사로 삼았다.

동 10월 7일 새벽 김연일, 김인수(金仁秀), 김용충(金用忠) 등은 법정사에 머물고, 법정사에 집결한 봉기군은 서귀포 방면으로 진격했다. 봉기군은 300~400명에 이르러 먼저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무차별 파괴하고 전소시켜 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비롯 경관 3명을 포박해 응징했다.

일제는 민족 종교인 선도교를 사교 집단으로 매도, 격하시켰으며 이 운동을 가혹하게 대처해 나갔다. 관련자 66명을 3차에 걸쳐서 목포검사국으로 송치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열렸다. 31명에 대해서는 실형이 언도되고 2명은 재판 직전에 심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또 15명에게는 벌금형이 내려지고, 나머지 18명은 불기소 처분을 선고해 석방됐다. 그는 1919년 2월 광주 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소위 칙령(勅令) 제120호 제6조에 의해 3년 감형이란 소위 특전을 받을 수 있었다.

 1925년 경남 범어사(梵魚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1927년 4월부터 1938년 7월까지 마하연(摩荷衍) 선원에서 수선안거를 성취, 법랍 6세로 성만(成滿)했다. 

이듬해 기림사의 주지로부터 도첩(度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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