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일(1550~1632)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제주마 500마리를 국가에 바쳐 승전에 기여했다. 이어 1627년 정묘호란 등 국난의 위기마다 말을 바치는 등 1000마리의 말을 진상했다.
그 공로로 종1품 숭정대부를 제수받았다. 조정은 김만일의 공로를 인정해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 제도를 신설, 자손들이 명마와 임금이 타는 어승마를 생산하도록 했다.
그의 고향인 의귀리(衣貴里)는 김만일이 높은 관직에 올라 임금에게서 관복을 받았다는 데서 유래됐다.
조선시대 제주 최고의 갑부가 된 김만일은 집안이 가난했으나 강씨 집안에 장가들면서 말을 물려받았다.
1841년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는 김만일은 정의현 사람으로 일찍이 한라산 숲속에서 말 한 필을 얻었다.
하루는 그 말을 잃어버렸는데, 여러 달이 지난 뒤 암말 10여 필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해마다 새끼를 낳아 3, 4년 사이에 1000여 마리가 됐다고 기술했다.
김만일은 뛰어난 가축 개량과 번식기술로 명마를 생산했다. 당시 좋은 말 1마리는 노비 3명 또는 포목 50동(同)에 해당할 정도로 값이 비쌌다.
이로 인해 말을 함부로 빼앗아 부를 축적하거나 중앙 고관들에게 뇌물로 바치려는 수령들이 나왔다.
김만일은 잦은 수탈로 우수한 종자가 끊어질 것을 걱정해 말의 눈을 멀게 하거나 가죽과 귀를 찢는 등 일부러 상처를 내서 불구로 만들어 우수한 종자를 보존했다.
광해군은 그를 불러 중앙군을 지휘·감독하는 최고 군령기관인 오위도총부 부총관(종2품)에 제수했다.
그런데 사헌부는 군령기관의 부총관은 소임이 매우 중해서 재상이나 왕족이 역임해왔다며 김만일에게 내린 관직을 거둬달라고 거듭 상소했다.
결국, 김만일은 3개월 만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그의 후손 83명은 218년 동안 산마감독관을 맡으면서 국가가 필요로 했던 전마(戰馬)와 역마(驛馬), 승마(乘馬)의 공급을 책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