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고향 그리는 사람들 위로한 ‘찔레꽃’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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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두봉, 일본서 한인 여공 해고에 반발해 투쟁…고향서 야학 운영
 배형규, 샘물교회 목사…아프가니스탄에 의료봉사 갔다 피랍·순교
 백난아, 1940년  ‘망향초 사랑’ 등으로 데뷔…국내외서 큰 인기
 백만숙, 애월읍 소길리 출신…한학 깊이 연구해 예문 등 지식 넓혀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명월국민학교에 세워진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비’. 한림읍 명월리 출신인 백난아는 데뷔곡 ‘망향초 사랑’에 이어 대표곡 ‘찔레꽃’ 등을 발표하면서 1940년대 초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등에서 인기가수로 급부상했다. 연합뉴스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명월국민학교에 세워진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비’. 한림읍 명월리 출신인 백난아는 데뷔곡 ‘망향초 사랑’과 ‘오동동 극단’에 이어 대표곡 ‘찔레꽃’ 등을 발표하면서 1940년대 초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등에서 인기가수로 급부상했다. <연합뉴스>

▲배두봉裵斗奉:1914(일제강점기)~1948(미군정기), 오사카(大阪) 전협(全協)에서의 항일 활동, 귀향 후에 야학을 통해 항일 전개, 일명 배창아(裵昌兒).

애월읍 하귀리 ‘귀일’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2년 오사카 ‘니시요도가와구’의 소진무림(小津武林)라는 방직 공장에서 한국인 여공(女工) 36명을 무단 해고한 것에 대해 동년 4월 22일 파업 투쟁을 전개, 이때 배후인물로 검거돼 1933년 6월 29일 징역 6월 형을 치렀다. 

출옥 후 귀향해 1933년 8월 야학을 설치해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을 역설하던 중 1934년 12월 야학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하귀리 1구(區)에서 김홍규(金弘奎), 김을봉(金乙鳳) 등이 운영하던 야학과 통합했다. 

통합 후 60여 명의 학동들에게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알리고 한국인의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 독립을 역설했다. 

한편으로 이천만가(二千萬歌), 혁명가, 단결가 등의 노래를 가르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했다. 

전협(全協)계 인물들인 배두봉(점원, 22), 강문일(25), 박영순(20), 김을봉(20), 김홍규(21) 등도 함께 송치되고, 1935년 5월 그 중 강문일, 박영순은 8월 23일 기소됐다. 

그는 1936년 8월 23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조국 광복 후 애월면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1947년 3월 1일 관덕정 광장에서 벌어진 반미(反美) 시위의 주동자로 체포돼 동년 4월 29일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포고령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구금,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948년 제주 4·3 사건 이후 농업중학교로 구인(拘引)되고 동년 12월 23일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배형규裵炯奎:1965~2007, 의료봉사자, 순교자(殉敎者), 본관은 분성(盆城)배씨 분성군파.

애월읍 애월리 ‘하-물’에서 제주 영락교회 장로 배호중(裵鎬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84년에 제주일고를 거쳐 한양대학을 졸업했다.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Mh.M.과정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샘물(敎會) 목사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2007년 선교와 의료봉사 차 전란(戰亂)으로 멍든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마침 의료봉사 중에 탈레반 반군(叛軍)에 피랍(被拉)되고 전 세계에 방영돼 세계인이 그의 생명의 구원을 기도하는 가운데 2007년 7월 25일 42세로 학살당해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의료 연구용으로 서울대 의대병원 제3연구병동에 기증, 이는 생전의 유지(遺志)를 따른 것이다. 미망인 김희련(金熙蓮)과 외동딸 배지혜(裵智慧)를 두었다. 

그의 순교비는 제주 이기풍선교센터와 제주영락교회에 있으며 또 한국기독교순교자 묘지에도 비(碑)가 세워졌다.

 

 

▲백난아白蘭兒(여):1927(일제강점기)~1992, 국민가수, 대표곡 찔레꽃.

2008년 12월 6일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사업회에 의해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비’가 세워지고. ‘찔레꽃’은 2006년 MBC가요대전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요 100에서 53위에 선정됐다. 

그녀는 한림읍 명월리에서 오남보(吳南保)와 어머니 고경화(高慶花)의 3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세 살 때에 가족들과 만주(滿洲)로 이주했다. 아홉 살 때 부친이 정어리공장을 경영해 함북 청진(淸津)에 정착했다.  

본명은 오금숙으로 백난아는 가수로 등단하면서 부른 예명(藝名)이다. 

빅타레코드사 주최로 함북 청진(淸津)에서 열린 신인콩쿠르에 참가해 소녀 금숙은 영예의 1등을 차지했다. 열세 살, 동덕보통학교 6학년 때(1940년)였다. 북성여중에 입학한 뒤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하는 콩쿠르에서 1등으로 당선됐다. 서울(경성) 본선대회에서 단발머리 소녀 오금숙은 가수 박향림의 ‘청춘극장’을 불러 공동 1등을 차지했다. 소녀는 태평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그녀가 처음 취입한 노래는 1940년 12월에 취입한 ‘망향초 사랑’과 이재호 작곡의 ‘오동동 극단’이었다. 이 무렵 백년설(白年雪)은 흰 살결에 난초를 좋아하는 아이라 해서 예명을 ‘백난아’라고 지어주었다. 

소녀가수는 데뷔곡 ‘망향초 사랑’, ‘오동동 극단’을 시작으로 당시 최고 작곡가들인 이재호, 김교성, 손목인, 박시춘 등과 손잡고 ‘갈매기 쌍쌍’, ‘황하다방’, ‘아리랑낭랑’ 그리고 그녀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찔레꽃’ 등을 발표하면서 40년대 초 인기가수로 급부상했다. 

특히 ‘아주까리 선창’의 취입 뒤 오사카에서 당시 최고가수인 남인수(南仁樹)를 만나 그의 소개로 일본 킹레코드사에 발탁돼 음반을 취입한다. 일본의 요시모도 흥행사의 눈에 띄어 한국, 중국, 일본의 3개국 가수들과 함께 6개월간 일본 순회공연을 펼쳤을 정도로 외국인 톱가수 대접을 받기도 했다.

1945년 12월 나이 스무 살에 고위 공무원이었던 이종호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데 이즈음 지난 1941년에 취입했던 노래 ‘찔레꽃’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망향가인 ‘찔레꽃’은 국내는 물론 멀리 만주, 중국 등에서도 크게 애창됐다.

환도(還都) 이후 악극단을 조직한다. 이름은 ‘부케악극단’으로 1956년 가수 생활 15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타이틀로 쇼 활동을 시작해 유호작의 ‘백설의 비화’ 그리고 손목인의 지휘로 ‘모던 춘향전’을 무대에 올리면서 인기가수 남인수, 나애심 등과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당찬 백난아씨는 1969년 악극단을 접고 이후 1970년 10월 13일 교포를 위문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한국의 국악인들을 불러들여 그곳에서 우리의 판소리를 지도하기도 했다. 

1985년 서울 충무로에서 수도예술학원을 설립해 작곡가 나화랑, 형석기 그리고 영화배우 이민씨 등을 교수로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1957년과 1961년에 이어 1986년 가수 현인(玄仁) 등과 함께 고향인 제주를 방문해 ‘翰林문화관’에서 공연을 펼쳤다. 

이 공연이 고향에서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1988년에는 ‘이별의 술잔’을 취입했는데 그의 마지막 곡이다. 

1992년 1월 21일 폐암으로 65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백만숙白萬淑:1912~1991. 호는 정암(靜庵). 

백치두(白致斗)의 외아들로 애월읍 소길리(召吉里)에서 태어나 백창유(白昌由)가 설립한 일신(日新)학교를 다녔으며 한학(漢學)을 깊이 연구해 마을의 후진인 부달선과 자주 예문(禮文)과 풍수지리(風水地理) 지식을 넓혔다. 

애월면사무소에 근무. 아버지 백치두는 소와 말을 100여 마리 길러 많은 전답(田畓)을 확보해 시골에서는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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