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비평’과 해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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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논설위원

벌써 20년 전 일이다. ‘제주정신’과 ‘제주인의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발단은 당시 송성대 교수가 <제주비평> 제2호(미래사회연구소)에 발표한 “제주인 정체성에 대한 쟁논(爭論)의 허와 실”이다. 이 글에서 송 교수는 “해민정신의 개체적 대동주의야말로 가장 제주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정신이다”라며 “해민정신은 한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 표상을 지리학적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일부 비판에 대해 반론을 폈다.

1990년대 중반 송 교수는 지역정신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제주지역을 대상으로 전통적인 삼무정신의 형성동인과 변용(變容)에 관해 다년간 연구했다. 단순히 지역정신이 무엇(what)인가 보다는, 왜(why) 그 정신이 형성되고, 어떻게(how)형성되는 가,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집중했다. 학자이기 전에 태생 교육자였던 그는 미래 세대들에게 손에 잡히는 꿈과 눈에 보이는 희망을 알려 주고자 했다.

그 결과, 제주이즘(Jejuism)으로 개체적 대동(大同)주의 해민(海民)정신, 즉 ‘심벡(경쟁)’이 있는 민주적 실력사회, ‘놈(남)’의 대동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이른바 ‘따로 또 같이(따또주의)’를 내놓았다. 공동체의 대동이념과 그 구성원의 개인정신의 복합된 제주인 특유의 생활규범이 삼무정신이라면 그것을 재현, 표상(表象)화한 것이 개체적 대동주의의 해민정신이라 주장했다.

굳이 정반합(正反合)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학문의 세계는 상호비판과 반(反)비판, 그리고 토론을 통해 성장한다. 지식인 사회의 논쟁은 침묵의 카르텔을 깨뜨릴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따라서 비판은 객관적인 논리를 갖추어 품격 있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다소 감정 섞인 표현과 과도한 지적으로 “주장에 반론이 아닌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 논리와 품격을 벗어나 동료 학인과 그들이 속한 시민단체에 대한 악의에 찬 비난과 욕설에 가까운 인신공격성 언어폭력”으로 비춰졌다(제민일보, 2002.1.30.).

재반론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신문투고 형식이다 보니 한정된 지면 탓에 오해만 쌓인 채 논리적 반박과 반론이 모자랐다. 급기야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학문적 논쟁은 사라지고 감정과 분노, 갈등과 상처만 남게 되었다. 서글픈 대목이다.

“사름은 이웃디 불 담으레 온 신세”라는 제주속담처럼 78세 해민정신 주창자는 그렇게 가셨다. 당시 논쟁의 ‘장(場)’을 제공했던 <제주비평> 역시 6호 발간 이후 제호(題號)만 유지하고 있다.

지금의 아쉬움은 두 가지다. 지역정신과 지역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연구가 사라졌다. 그에 대한 논쟁은 더더욱 없다. ‘누가 제주인 인가’, ‘제주인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무게감 있는 고찰이 안 보인다. 대부분의 굵직한 사회 갈등 문제들은 잘해야 봉합 수준에서 어정쩡하게 묻혀진다. 게다가 진지한 논쟁을 할 ‘판’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학술논문집들은 형식이 엄격하여 접근이 어렵고 신문은 지면에 한계가 있다. 그러다보니 댓글에 상처받고 검색순위에 열광한다.

이제라도 지역에서 사회비평지가 복간되어 지역정신과 정체성, 역사인식과 시대 흐름, 미래 비전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부활됐으면 한다. 그 논쟁 판에 사색하는 재야의 ‘고수’들을 모셔 그간 갈고 닦은 내공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편한 멍석 펴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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