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나눈 제주목사와 유배인…탐라순력도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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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이형상 목사·유배인 오시복
1702년 6월 남인 좌장격이던 오시복, 감산리에 위리안치
제주목사 이형상과 적극적으로 교우하며 조언 주고받아
오시복이 이형상에 순력 행사·사냥 모습 기록 제안하자
화공 김남일을 시켜 20일에 걸친 순력 장면 화폭에 담아
1702년 오시복이 이형상 목사에게 보낸 편지. 남인의 중심인물로 장희빈 사후 감산리에 위리안치된 오시복은 제주목사 이형상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적극 교우했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1702년 남인의 좌장격인 오시복이 이형상 목사에게 보낸 편지. 장희빈 사후 안덕면 감산리에 위리안치된 오시복은 제주목사 이형상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며 적극적으로 교우했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1702년 3월 남인의 중진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임명돼 제주로 향했다. 

같은 해 6월 남인의 좌장격이던 오시복이 제주에 유배돼 대정현에 위리안치됐다. 

당시의 시국은 제주에 유배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서울로 압송돼 사형에 처해지는 등, 요동치는 정국으로 남인들에게 불리한 정국이었다. 

▲탐라순력도의 탄생과 관련 이야기

멀고도 먼 원악의 땅에서 예기치 않게 해후하게 된 두 사람은 대략 보름 간격으로 간찰(편지)을 주고받았다. 

노복들과 손자까지 대동하고 대정현에 도착한 오시복은 지붕에서 벌레와 뱀들이 떨어지는 열악한 거처부터 목수들을 동원해 손을 보고, 정의현감이 구했다는 준마를 보러 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탐라순력도 우도점마. 이형상 목사가 오시복의 조언대로 임금에게 바칠 준마를 물색하기 위해 우도에 갔을 때의 광경을 담았다.
탐라순력도 우도점마. 이형상 목사가 오시복의 조언대로 임금에게 바칠 준마를 물색하기 위해 우도에 갔을 때의 광경을 담았다.

다음은 7월 13일 오시복이 이형상 목사에게 보낸 간찰이다. 

“어제 우도로의 행차 시 바람과 풍랑이 매우 거칠었을텐데 들아와 평안하신지요. (중략) 영감이 임금을 향한 정성은 지극하십니다. 조만간 반드시 준마가 저절로 나타날 것인데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이형상 목사는 오시복의 조언대로 임금에게 바칠 준마를 물색하려 순력에 앞서 우도에 갔다. 

다행히 준마 3필을 얻어 진상할 수 있었다. 이날의 광경이 훗날 탐라순력도의 우도점마(牛島點馬)로 나타난 것이다. 

오시복은 아래의 글에서 보듯, 교래에서의 사냥을 준비하던 이형상 목사에게 좋은 말을 미리 골라두었다가 임기가 끝날 때 진상에 대비하라고 조언도 한다. 

그리고 다음을 덧붙인다. 

“… 생각컨대 영감의 오늘의 위의(威儀)는 진정 남아가 할 일이니 나중에 친지들이 그 성대한 거사를 볼 수 있도록 화공에게 그리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이렇듯 제주에서 가장 귀중한 역사적 자료 중 하나로 평가받는 탐라순력도는 오시복의 제안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겠다. 

그해 10월 29일부터 11월 12일까지 제주 전역을 도는 순력의 행사는 오시복의 조언대로 제주의 화공 김남길에 의해 그려졌다. 

이형상 목사는 유배인 오시복의 배소인 감산리에 들러 3일간 머물다 떠난 것이 간찰을 통해 확인된다. 

지방수령이 위리안치된 중죄인의 배소에 3일간 묵은 행위는 매우 위험한 처신이었다. 

▲이형상 목사와 오시복이 주고받은 간찰

남인의 중심인물로 이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낸 오시복은, 1701년 사약을 받고 절명한 장희빈과 관련해 궁중에서 복제(服制)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아본 죄목으로 감산리에 위리안치됐다. 

제주유배 기간 중에도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에게 행정 자문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목사와 교우했다. 

다음은 유배인 오시복이 이형상 목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이다.

“…혹독한 더위를 무릅쓰고 수천 리 물과 땅의 길을 건넜던 천신만고의 상황도, 병들고 견디기 어려움도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대정읍성은 물과 토질이 매우 나쁘고 또한 한 칸짜리 살만한 방이 붙은 집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골(감산)집을 골라 울타리를 치겠다는 뜻을 이미 금오랑에게 통지했습니다. ….”

다음 글 역시 오시복이 이형상 목사에게 보낸 편지로, 이형상 목사가 조천읍 교래리 부근에서 잡은 짐승 중 세 마리를 인편을 통해 오시복에게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또한, 오시복은 사냥하는 모습을 화공을 시켜 그리게 하면 어떠겠냐고 이형상 목사에게 제안하고 있다. 

실제로 1702년 음력 10월 29일부터 11월 12일까지 20일에 걸친 순력 장면은, 화공 김남길에 의해 그려져 탐라순력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보내주신 세 마리 짐승은 온 집안 어른과 아이들이 모여 구경하며 놀라워 했을 뿐만 아니라, 내일 아침 부엌을 푸짐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깊이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이만 바삐 줄입니다.”

다음은 오시복이 유배지인 감산리에서 이형상 목사와 함께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목사의 순력행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별의 마음을 전하는 편지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밤이면 아침에 이르기까지 초조한 생각을 스스로 달랠 수 없어 아이들과 더불어 얘기를 하는데, 영감께서 돌아온 것에 대해 이말 저말 쉬지를 않았습니다. … 날이 밝자 일찍 다시 길을 나서는 (목사님의) 수레는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산방산의 기이한 자취는 더욱 천하의 뛰어난 경관이지요. 그리고 거기에 깊숙이 사로잡히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붓을 대어 5언과 7언으로 두 절구시를 이미 지었는데 애오라지 한바탕 웃어주십시오.

갑자기 사흘 밤새워 이야기 하며 / 맑은 새벽 헤어질 때 / 새 봄이 멀지 않을 줄 알고 / 필마로 만날 약속 어기지 마오 / 꾸불꾸불 깃발 들고 산방산 가리키는데 / 고각소리 속에 더욱 애를 끊네 / 헤어지며 어찌 아녀자 헤어지듯 하랴만 / 저절로 맑은 눈물 옷을 적시네. (11월 10일 감산 유배인 머리 조아리며 글을 올립니다.)“

▲파국 맞은 이형상 목사

이형상 목사가 부임한 지 일 년 만인 1703년 3월, 대정현에 안치된 죄인 오시복을 풀어줄지 말아야 할지를 묻는 문서인 이형상 목사의 장계가 승정원에 도달한다. 

또한, 오시복과 함께 제주에 유배되었던 남인 계열의 유생 유황까지 품질에 올렸다. 

이러한 내용을 본 승지들은 경악했다. 

대사간 이건명이 직접 나서 이형상 목사의 삭탈관직을 요청했다. 

오시복에게는 유배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형상 목사는 제주 특산물인 오미자를 조정에 올렸다. 

대정현 감산리 배소에 그대로 남겨진 오시복은 제주를 떠나는 이형상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칠언율시로 이별을 고했다.

“유유한 이별의 한은 넓은 바다처럼 깊은데 / (그대 떠나는) 북쪽 포구 돌아보려는데 한라산이 막아섰네 / (중략) / 호연정(경북 영천에 있는 이형상의 거처)에서 책 읽고 거문고 타는 즐거움 누리더라도 / 적어도 감산의 늙은 벗 정도는 기억해주길…”

탐라순력도와 병와 선생 문집에 있는 ‘탐라순력도의 화기에 오노의 필을 요청해 일첩을 장황하고 탐라순력도라 하였다.’라는 문장에서 오노는 오시복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제 또 영감의 편지를 받고 이에 안부가 평안하심을 알고 위안이 됩니다. … 말씀한 서(탐라순력도 서문)를 쓰려 하니 요즈음 기분 나쁜 생각이 들어 붓을 잡을 틈이 없었는데, 조금 기다리면 그에 부응하려 합니다만, 인편으로 즉시 드리지 못하여 깊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보내주신 물건에 깊이 감사드리고 더욱 염려해 주심이 갈수록 더 두려워져 이만 그쳤으면 할 뿐입니다. 마음이 소란하여 잠시 이만 줄입니다. 감산루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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