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역모에 휘말려 고초...귀양지서 애달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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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철, 유배객 중 가장 오래 머물러...27년간 제주에
의녀 홍윤애와의 만남...고진 고문 속 절개 지키다 순절
제주 목사로 자청해 부임...홍의녀묘 세우고 애도시 적어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의 구릉에 자리 잡은 홍윤애의 묘.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의 구릉에 자리 잡은 홍윤애의 묘.

제주서 27년간의 유배를 견디다=조정철(趙貞喆, 1751~1831)은 조선 후기 형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조정철의 가문은 당쟁이라는 격랑 속에 부침을 거듭했다. 그의 증조부이자 노론(老論) 4대신의 한 명이었던 조태채로부터 집안의 비극은 시작됐다.

정조 추대 문제로 노론과 소론(少論)의 갈등이 격화된 신임사화로 인해 조태채는 진도로 유배를 가 죽임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조정철의 가문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는데 그의 조부이자 조태채의 맏아들인 조정빈은 1723년 제주도 정의현에 유배됐다. 그런가하면 조정철의 아버지 조영순 역시 탕평책을 언급했다는 죄목으로 1754년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다.

이러한 역사는 조정철에게도 대물림됐다. 조정철은 제주에 왔던 유배객 중에서 가장 오래 유배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그의 유배는 막강한 세도를 누렸던 처가의 여파가 컸다. 정조는 집권하자마자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이른바 노론 벽파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표적이 된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조정철의 처가다. 조정철의 장인 홍지해는 사도세자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갔던 주범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정조가 쥐고 있는 복수의 칼날이 다가오자 궁지에 몰린 홍지해는 급기야 정조를 시해하고 정조의 이복동생을 왕위에 올리려는 위험한 계략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정조 시해 모의 사건이다. 하지만 궁중에 숨어들었던 자객들이 붙잡히면서 사건은 처하에 드러나고 시해 모의의 주모자인 홍 씨 일가는 피바람으로 풍비박산이 난다.

이런 와중에 목숨을 건진 조정철은 제주 유배형에 처해진다. 그가 제주에서 보낸 유배 기간은 1777년부터 27년 간이다.

유배지에서 꽃피운 로맨스=홍의녀로 알려진 홍윤애는 조선 영·정조 때 제주목(濟州牧)에 살던 여인으로, 일명 홍랑(洪娘)이라고도 불린다.

제주에 도착하자 마자 아내가 자결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조정철은 제주 여인 홍윤애와의 만남을 통해 위안을 얻게 된다. 홍윤애는 조정철의 의복과 식사 수발을 도왔던 여인이다.

제주 유배 중 조정철은 책도 읽지 못하고 마당에도 나오지 못하는 가혹한 형벌을 견뎌야 했다. 수시로 관리들이 드나들면서 사소한 일까지 트집 잡아 모욕을 주는 것쯤은 예사였다.

홍윤애는 섬에서 구하기 어렵고 귀한 문방사우 등을 상인에게 몰래 부탁해 구한 후 조정철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홍윤애는 대역죄인인 그에게 기꺼이 사랑을 바쳤고, 그와 정식으로 혼인을 맺지는 않았지만 딸을 낳기도 했다.

1781년 노론의 조정철 집안과 할아버지 때부터 원수지간이었던 소론의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부임하면서 이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모함해 죽이려고 딸을 낳은 지 채 백일도 안 된 홍윤애를 잡아 들여 거짓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모진 고문을 한다.

그러나 홍윤애는 공의 목숨은 나의 죽음에 있다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고 형틀에 매달리는 고문을 당한 끝에 순절했다.

홍윤애 고문치사 사건은 조정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김시구 목사는 4개월 만에 파직 당해 의금부로 압송됐다. 제주판관 황인채와 대정현감 나윤록도 벼슬이 갈렸다.

정조는 수령을 잘못 추천한 죄로 이조참판 김하재를 파직했고, 홍윤애와 연관이 없던 정의현감까지 갈아 치웠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 제주 3읍 수령과 판관까지 교체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김시구는 다시 제주도에 유배를 와 있는 사람들이 역모를 꾸민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고, 조정철은 새로 부임한 제주 목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홍윤애 묘는 원래 삼도1동에 있다가 1937년 제주 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됐다. 사진은 마을 전경.
홍윤애 묘는 원래 삼도1동에 있다가 1937년 제주 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됐다. 사진은 마을 전경.

다시 찾은 제주=조정철은 제주를 떠난 후 추자도와 전라도 광양, 구례, 황해도 토산현 등을 거쳐 30년간의 한 많은 유배 생활을 마무리한다.

1805(순조 5) 사면 복권된 조정철은 유배에서 풀려났고, 1811년에는 제주목사로 자청해 부임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당도했던 유배지에 환갑의 나이로 그 땅을 다스리는 관리가 돼 돌아오게 된 것이다.

제주를 떠난 지 8년 만이고, 해배된 지는 4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1812년 동래 부사로 부임할 때까지 1년 간 제주도에 머물면서 홍윤애의 혼을 달랬다.

그는 부임 즉시 사랑했던 여자 홍윤애의 혼을 달래고자 무덤을 찾아 홍의녀묘라고 비를 세우고, 애도시를 적어 넣었다.

목숨을 내놓고 사랑을 지킨 홍윤애를 위해 조정철은 비문에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혼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라는 시를 남겼다.

이곳은 유배 문학의 꽃으로 여겨진다. 특히 조정철이 홍윤애를 위해 세운 묘비는 시비로는 우리나라 유일의 금석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윤애 묘는 원래 삼도1동 전농로 공동묘지에 있다가 1937년 제주 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손자인 박규팔의 무덤이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됐다.

유수암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들이 자리한 중산간 지역 중에서도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다. 해발 200~250m 높이에 위치한 마을로 큰노꼬메오름 등 여러 개의 오름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유수암의 옛 이름은 흐리믈(우물)’검은데기(바위언덕)’ 등이다.

생수가 용출해 사계절 끊이지 않고 물이 흐르는 언덕이란 뜻으로 흐리물이란 지명으로 오랫동안 불리다가 지금은 유수암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라산의 물이 표토 중간층에서 저류돼 용출한 유수암천(流水岩泉)’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된 셈이다. 주민들은 이 물이 마을을 대대로 지켜왔다고 믿고 있다.

홍윤애 무덤 앞의 이끼 낀 비석에는 홍의녀지묘란 글씨가 뚜렷하다. 고즈넉하게 들어선 무덤을 바라보면 수백 년 전의 사랑이 느껴진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숨이 다 할 때까지 임을 위해 지킨 지조와 절개,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은 시대를 넘어서 잔잔한 감동을 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전해지는 조정철의 묘는 충주시 인근에 있다. 조씨문종회는 최근에 홍윤애를 족보에 등재하고 정식 부인으로 맞는 의식도 치렀다.

한편 조정철은 제주 목사로 있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서외곽을 개축해 왜구나 폭동에 대비했고, 12개 과원을 설치해 감귤 재배를 권장했다.

그는 1813년 충청도 관찰사 이후 1830년 사헌부 대사헌, 지충추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며 평탄한 말년을 보냈다.

진주리 기자 bloom@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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