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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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논설위원

살아가는 동안 기쁘고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이 울고 웃는 사람이 바로 친구다. 친구가 되는 계기는 지연과 학연이 있으며, 같은 직업 때문에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업연(業緣)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친구의 범위는 지연, 학연, 업연까지 모두를 포괄한다. 이중섭 또한 원산에서, 일본 유학 시절,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작고할 때까지 고향 친구부터 학우들, 같은 미술인들까지 다양한 친구가 있었다.

이중섭 친구들의 기억은 이중섭이 직접 남긴 기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중섭의 전기(傳記)를 재구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미술사의 한 부분을 복원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중섭과 동시대를 함께 보낸 몇몇 친구들의 과거를 회상해 보자.

현재 생존해 있는 화가 김병기(1916~)는 이중섭과 평양 종로보통학교와 일본 문화학원 동창이다. 그는 해방되던 해에 이중섭과 평양에서 6인전을 열었고, 1956년을 전후해 이중섭이 살았던 정릉에서 다시 만났다. 김병기는 “이중섭은 타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듯이 173㎝의 늘씬한 체격이요. 또 청년 시절에, 러닝, 철봉, 수영, 권투 등 만능 운동 선수였다”고 회고했다.

최재덕(1916~?)은 1936년 이중섭과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입학 동기다. 1941년 이중섭과 함께 제1회 조선신미술가협회 창립전을 열었다. 1945년 해방기념미술전에 참가하기 위해 이중섭이 서울에 왔으나 시간이 늦는 바람에 출품하지 못하고 최재덕과 미도파백화점 벽화를 그렸다. 1946년에는 최재덕과 함께 독립미술협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이중섭의 친구인 시인 구상(1919~2004)은 원래 서울 출생인데 원산에서 자랐고, 1939년 일본 도쿄에서 이중섭을 만났다. 구상은 1947년 원산문학동맹에 기고한 글이 검열 사건에 연루되자 월남했다. 그는 1955년 대구 미공보원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을 주관했으며, 이중섭이 병이 나자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이후 1956년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한 이중섭을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겨 주었다. 이중섭이 사망하자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이중섭을 회고하는 글 「향우(鄕友), 중섭 이야기」를 발표했다.

박수근(1914~1965)이 이중섭을 만난 것은 1946년 강원도 해방 기념 종합전이 원산에서 열렸을 때였다. 1949년 금강산에 있었던 한묵과 강원도 금성에 있었던 박수근이 원산의 이중섭 집으로 찾아갔으며, 그 인연은 피난지에서도 이어졌다. 1952년 부산에서 만들어진 월남미술인회에 참가하면서 박수근은 이중섭을 다시 만났다.

이경성(1919~2009)은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1930년대 일본 와세다대학을 다닐 때 먼발치에서 이중섭을 본 적이 있고, 해방 후 1946년 인천시립예술관 관장 시절에 인천을 방문한 이중섭을 만났고, 1952년 11월 월남미술인 작품전이 열리던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이중섭과 재회했다. 1955년 이경성은 홍익대학교 미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김환기와 의논해 1955년 미도파 화랑 이중섭 개인전에서 작품 한 점을 5만원에 구입했다. 그것이 유명한 <흰소> 작품이고 현재 홍익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돼 있다.

친구들의 기억 소환으로 이중섭의 삶의 여정이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지면서 한 위대한 화가의 삶의 노래가 우리 앞에서 더욱 빛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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