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제주 최초의 여학교, 천주교 성당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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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삼도2동 한짓골, 라크루 신부 1909년 유배인 박영효의 기부로 신성여학교 설립
1회 졸업생 최정숙 초대 교육감 역임…여성 선구자 배출 앞장
중앙성당, 한말에 복음의 씨앗 뿌려…1987년 민주화운동 성지로
제주신성여자고등학교가 태동한 향사당(나무로 가려진 기와 건물)과 천주교 중앙성당.
제주신성여자고등학교가 태동한 향사당(나무로 가려진 기와 건물)과 천주교 중앙성당.

1886년 한불수교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났지만 전국에서 천주교인과 비(非) 신자들 사이에 300여 건의 교안(敎案·종교 충돌)이 일어났다.

1901년 신축년 제주에서는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이 발생, 교인과 양민 등 300여 명이 희생됐다.

앞서 1899년 5월 제주에 처음 발을 디딘 천주교 사제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페네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 신부다. 페네 신부 후임으로 1900년 6월 프랑스인 마르셀 라크루 신부(1871~1929)가 부임했다.

라크루 신부는 2명의 복사와 2명의 신자와 함께 제주에 도착했다. 그는 이재수의 난으로 희생된 300여 명의 천주교인을 매장할 황사평 안장지를 홍종수 제주목사에게 양도받았다.

그는 1909년 10월 18일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향사당을 교사로 활용, 신성여학교를 설립했다.

제주 최초의 근대 여자교육기관이 태동했다. 도내 여성들이 새벽하늘을 밝히는 샛별이 되도록 학교명을 신성(晨星)으로 지었다.

라크루 신부는 학교 운영을 위해 샬트르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한국인 수녀 2명을 초빙했다.

1915년 라크루 신부가 떠나기 전 학생들과 찍은 사진. 신성 100년사 수록
1915년 라크루 신부가 떠나기 전 학생들과 찍은 사진. 신성 100년사 수록

여학교가 들어선 것은 한말에 제주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한 박영효(1861~1939)의 공이 컸다.

급진적 개화사상가인 박영효는 김옥균과 서재필 등과 함께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명성황후의 외척세력은 청나라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면서 거사는 삼일천하로 끝났다.

역적으로 몰린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됐지만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제주에 유배됐다.

박영효는 성금을 기부하고 도민 모금운동을 전개하면서 제주에 근대 학교 개교에 앞장섰다.

1909년 라크루 신부가 천주교 조선교구 8대 교구장인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는 “관대한 한 분(박영효)의 자발적인 협력 덕분에 제주에 여학교 설립의 가능성은 더 이상 공상이 아닙니다”라고 썼다.

박영효는 제주에서 친분을 맺었던 최원순의 딸 최정숙을 신성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신성여학교는 1914년 1회 졸업생 6명에 이어 2회 6명, 3회 16명을 배출했다. 그런데 라크루 신부가 전주성당으로 전출되자 학교는 재정난에 봉착했다.

이 기회를 노린 일제는 학교 건물을 빼앗아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라는 일본식 절을 세웠다. 사찰은 일본의 풍습에 따라 거류 일본인 사망자들의 유골 안치소로 이용됐다.

1916년 7월 재학생 150여 명이 있었지만 일제에 의해 설립 7년 만에 휴교를 하는 비운을 맞았다.

미싱으로 봉제를 배우는 여학생들. 신성 100년사 수록
미싱으로 봉제를 배우는 여학생들. 신성 100년사 수록

광복이 되자 1회 졸업생이자 교육운동가인 최정숙을 중심으로 학교 재건을 추진해 1946년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 개교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학교를 일본인 소유의 적산(敵産) 건물로 취급했다. 신성학원은 법정 투쟁에도 환수를 못했으나 졸업생과 도민의 성금을 모아 건물과 부지를 되찾았다.

1949년 최정숙은 이 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최 교장은 여성 문맹 퇴치와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64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감이자 초대 제주도교육감으로 선출됐다.

한편 1899년 페네 신부는 제주읍 한짓골에 초가 9칸을 1550냥에 사들여 성당 건물로 삼고 선교를 시작했다.

라크루 신부는 초가 성당을 기와집으로 개조했다. 세도가들이 살던 한짓골은 남문에서 관덕정을 잇는 큰 길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한질’ 또는 ‘한길’은 큰 길을 뜻하는 제주방언이다.

한말 제주에 파견된 파리외방선교회 사제들이 성당을 건립해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서 1년 만에 교세가 확장됐다.

1901년 이재수의 난이 발생하기 전 세례를 받아 입교한 신자는 242명, 예비신자는 700명에 이르렀다. 농촌마을에도 공소를 뒀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4만여 명으로 도민 40명 중 1명이 천주교 신자였다.

1930년 중앙성당은 고딕식 붉은 벽돌로 신축됐다. 고딕풍의 성당은 제주성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성당 종탑에는 프랑스제 서양식 성종을 매달아 매일 타종했으나 일제가 전쟁물자로 공출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토마스 신부 등 외국인 사제와 신도 10여 명이 간첩 혐의로 체포돼 1945년 광복 전까지 옥살이를 했다.

일제는 성당을 점거해 육군 야전병원으로, 사제관은 일본군 장교 숙소로 이용했다. 중앙성당은 1948년 제주4·3이 발생하면서 선교와 신앙활동이 위축됐다.

1980년대 중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다. 1987년 6월 전두환의 뒤를 이어 체육관 선거로 노태우를 집권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려고 하자, 전국에서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성당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밤샘 농성을 벌였고, 사제들은 시국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제주대학교 학생 김윤삼씨는 진압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실명했다.

제주에서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놓은 6월 민주항쟁의 30주년 기념 표석은 2017년 중앙성당에 세워졌다.

1909년 신성여고가 들어섰던 향사당 전경.
1909년 신성여고가 들어섰던 향사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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