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해녀 항일 운동 주역…빗창 들고 일제 수탈에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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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계웅, 한말 유배인 최익현과 교류…의흥학교 등서 한문 교육
 부기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일제 탄압에 신경쇠약으로 타계
 부달선, 서예로 국전 입선…경기도전 심사위원·초대작가로 명성
 부대현, 제2대 제주도교육감 등 역임…세화고에 송덕비 세워져
 부덕량, 1932년 1월 7·12일 세화장터서 시위…6개월 동안 옥고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9년 1월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일원에서 개최된 ‘제87주년 해녀항일운동 기념식’. 일제강점기 당시 해녀들이 일본의 침탈 행위를 규탄하며 시위하는 모습을 재현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9년 1월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일원에서 개최된 ‘제87주년 해녀항일운동 기념식’. 일제강점기 당시 해녀들이 일본의 침탈 행위를 규탄하며 시위하는 모습을 재현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부계웅夫啓雄:1838(헌종4)~1909(융희3), 서당 훈장, 호는 나산(拏山), 본관은 제주.

구좌읍 한동리 ‘궷-골’에서 부종학(夫宗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선친으로부터 한학과 시문을 익혀 성리학·천문학·지리학 등을 터득했다. 당시 장터 마을 송당과 성읍에서 비오는 날 수탉과 나막신을 서로 싸움질시켰다는 후세에 널리 알려진 전설적 인물이다. 

한말 제주에 유배 온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교유하기도 했다. 

조천읍 조천리, 구좌읍 연평리, 남원읍 위미리 등지에서 재래식 서당의 훈장으로 활동이 바빴다. 1903년 조천의 의흥학교(義興學校)에서, 1906년 조천의 신명(新明)사숙에서, 1907년 성읍리에 세운 의명학교(義明學校)에서 초빙을 받아 성숙한 한문 강독에 힘썼다. 

▲부기준夫己準:1911(일제강점기)~1946(미군정기), 광주 학생운동 당시 배재(培材)고보 항일 활동, 일본식 성명은 마츠다(松田己準). 본관 제주.

우산(愚山) 부정규(夫正奎)의 4남으로 조천읍 북촌(뒷-개)에서 태어났다. 부정규의 장남 인 현재(弦齋) 부성준(夫性準)은 동향 사람 김균배(金勻培)와 함께 광주로 가서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조천)에게 한학을 배운 반외세 항일 민족주의자이며 또 3남 부병준(夫丙準)은 항일 운동에 몸바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바 있다.

부기준은 서울로 유학, 사립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학생 전위동맹(前衛同盟) 간부가 돼 격렬하게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그는 더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廣島) 현 구레시(吳市)의 중학교에 다녔다. 앞서 서울에서의 항일 운동과 관계된 일로 종로경찰서에서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는데 1930년 5월 7일 구레시의 헌병대원에 의해 체포됐다. 이에 종로(鐘路)경찰서에서 우메노(梅野)와 이(李) 두 형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신병을 인수하고 동년 5월 11일 서울로 와서 조사를 받았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항일인사에 대한 탄압과 미행을 일삼았다. 그는 자주 당국에 구인당하면서 신경쇠약과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해 1946년 여름 타계하였다. 

▲부달선夫達善: 1924(일제강점기)~1983. 서예가, 한시 작가, 호는 소강小岡, 연산蓮山, 노송老松, 녹고산인鹿故山人, 반재실주인磻齋室主人 등 다양하게 사용했다. 녹고산인이란 자기 고향의 진산鎭山인 ‘녹고-뫼’의 사람이란 뜻이다. 

애월읍 소길리의 부유한 농가에서 출생해 신엄리 소재의 일신(日新)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大阪) 경판(京阪)상업학교에 다니다 중퇴했다. 42세에 글씨를 배워 국전에 입선한 뒤 각종 서예전에 자주 입선했다. 

귀국 후 인천에 살면서 중구(中區)의 신생동에서 1973년 이후 소강서도원(小岡書道院)을 차려 후진에게 붓글씨를 가르쳤다. 경기도전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의 붓글씨는 ‘제주부씨 시조비문’, ‘함안박씨 시조 3대 비문’, ‘파평윤씨 중시조비문’ 등이 유명하다. 자작시를 자필해 ‘소강한시선집(小岡漢詩選集)’을 내었다. 

※부달선의 시 ‘望鄕 고향 생각’=海上群鷗與共親: 바다 위에 갈매기는 날아 갈 줄 모르는데 /一帆風送往來頻: 돛대에 바람 불어 자주 오락가락 /垂楊無力難留客: 수양버들 무력하여 가는 손님 못 말리고 /香橘多情似待人: 향귤은 다정하여 오는 님을 기다리듯 /夢裏春過花已晩: 꿈 길 속에 봄은 가고 꽃구경은 늦었는데 /望中山出月空新: 어느 사이 산에 뜬 달 부질없이 새로워라 /遙知瀛島南歸日: 남쪽에 있는 제주도로 돌아가는 날 아득하지만 /滿洞煙霞不自貧: 골짜기에 가득한 경치 부족함이 없는 곳

▲부대현夫大炫:1908(융희2)~1986, 교육자, 행정가, 남제주군수, 제2대 제주도교육감, 고·양·부 삼성(三姓)재단 이사장, 한라장학회 회장 등을 역임, 호는 월봉(月峰).

구좌읍 세화리에서 부정우(夫正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화사(花史) 문신주文新周·화산) 고성범(高性範)에게 한문을 배운 바 있다. 1979년 7월 세화고등학교에 ‘월봉 부대현선생 송덕비’가 세워졌다. 앞서 그는 세화리 의신(義信)사숙에서 초등과정을 마쳐 1921년 제주농업학교 2학년에 다니다가 상경, 1923년 4월 배재고보(培材高普)에 편입학해 1928년 3월 졸업했다. 이듬해 4월 하도사립보통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돼 1938년 교장으로 승진했다.

1932년 해녀 항일운동의 배후세력으로 혁우동맹(革友同盟) 맹원(盟員)인데도 기소될 때 이를 면했다. 1944년 구좌면장 전인홍(全仁洪) 당시 부면장으로 부임했다. 

해방된 후 1946년 3월 구좌면장, 1950년 세화중학교 기성회장을 맡아 이듬해 세화중학교의 개교를 보게 됐다.

1954년 7월 길성운(吉聖運) 도지사에 의해 남제주군수로 발탁됐다. 이듬해 제주도 학무과장으로 등용됐고 이어 지방과장과 사회과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4·19 이후 3·15 부정선거로 양제박(梁濟博) 도지사에게 사표를 냈다. 

1964년 1월 1일을 기해 도단위(道單位)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자 그는 초대 교육위원으로 위촉됐다.

1968년 1월 1일 정부에서는 제2대 제주도교육위원으로 강운옥(康雲玉·서귀), 김문규(金文奎·중문), 고봉식(高奉湜·제주시), 김석두(金碩斗·제주시), 김두희(金斗熙·구좌) 등 5명을 위촉했다.

전 교육감 최정숙은 당연직 교육위원이 되며, 또 도지사 정우식(鄭雨湜)은 당연직 교육위원회 의장이니 투표 결과 부대현이 4표를 얻어 제주도교육감에 당선됐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제주해녀박물관 인근에 세워진 부덕량 흉상.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제주해녀박물관 인근에 세워진 부덕량 흉상. <제주일보 자료사진>

▲부덕량夫德良:1911~1939(일제강점기).

해녀의 신분으로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일본의 침탈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관제 조합의 부정으로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에 해녀들은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부당한 해녀어업조합에 맞섰다. 

1932년 1월 7일과 12일 세화장터에서 1000여 명의 해녀들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녀는 시위 후 동월 24일경 일경이 우리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하려는 것을 온 몸으로 저지하다가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려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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