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없다고 갈 수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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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익 칼럼니스트

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무언의 희망이다. 하여 길이 없음으로 헤매어 본 사람은 더욱 그 가치를 안다. 길이 보이면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그냥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땅 한 평이 없는 몹시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중학교도 아버지의 희망을 꺾고 진학했다. 고등학교 이상은 정말로 진학을 않는다는 조건으로 농업계 고등학교를 택했다. 당시 농고는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만 가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2학년이 되자 진학을 하고 싶다는 열기가 강력하게 솟아났다. 길이 없으니 더 이상 가려는 것은 무리일 텐데 이왕 먹은 굳센 마음은 변할 수 없었다.

동기 81명 중에 일반계열 대학의 진학은 혼자였다. 체육특기자로 진학한 두 명이 더 있었다. 말할 것 없이 독학은 엄청 힘들었다. 당시는 지금의 수능이 대입예비고사일 때여서 웬만한 고등학교에선 몇 사람이나 예비고사에 합격했는지 따질 때였다.

영어는 어렵게라도 극복했는데 수학은 끝까지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겐 길이 없다고 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길이 없음으로 해서 용기가 솟았다.

이후에도 내겐 실제의 길이든 상상의 길이든 간에 몇 번 고난을 당했다. 길은 어디에도 있음을 지금도 믿는다. 단지 그 길을 찾지 못해 어려울 뿐이다.

오름 산행에서 혼자 낙오되어 실제의 길을 찾지 못하고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섬뜩하다. 여름 초입의 서귀포시 남원읍의 ‘이승이오름’. 죽기를 각오하고 가시덤불과 곶자왈을 맨손으로 헤쳐 나갔던 무지함, 달리 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어찌할 것인가.

이왕 죽을 것이면 걷다가 죽자고 펴놓은 누울 자리를 걷어찬 것이 길을 찾게 했다. 환희여, 환희여.

아내와 친구들을 만났을 때 화급한 것은 물이었다. 곶자왈을 몇 시간씩 헤매면서 물 한 모금을 못 마셨기에 그 갈증은 ‘타는 목마름’이었다’.

오죽했으면 소변을 받아서 입을 축여볼까도 생각했지만 생각으로 끝냈다. 정상 상태에서는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의 양 3ℓ로 겨우 목을 축인 것 같았다.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신기루처럼 멀리 있는 길을 찾으려고 헤매는 것은 아닐까. 길이 안 보이면 길을 만들면서 갈 생각보다는 쉽게 포기한다. 마치 여우가 높은 곳에 있는 포도를 보면서 “저 포도는 시어서 못 먹어”라고 포기하는 것처럼.

내게도 승차를 잘못해서 교통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다.

택시가 행사 장소인 천지연의 갈비 집에 거의 도달했을 때 퍽 부딪는 소리와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대형 교통사고였던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불법으로 교차로를 가로지르던 화물차와 내가 탄 콜택시가 정면 충돌한 것이었다.

서귀포엔 신경외과가 없어서 제주시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며 119 신세를 졌다.

병원에서 MRI 촬영을 받았더니 4개월 진단의 중상이었다. 4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헤맸다.

목뼈에 덧붙어 자라는 악성의 불필요한 뼈가 있다는 것도 주치의의 설명으로 알았다. 60대 초반에 갑자기 쓰러지면 그것으로 평생 요양원 신세를 져야 한다는 섬뜩한 얘기였다. 교통사고는 안 됐지만, 불필요한 목뼈가 발견됐으니 정말로 천만 다행이라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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