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중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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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철, 제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논설위원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듣고 싶기도 한 말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듣고 싶은 말은 “존경합니다”인 것 같다.

사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끼리끼리 하나하나의 행동에 따라, 수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이지만, “존경합니다”는 가까운 사이나 먼 사이를 막론하고, 아름다운 삶이 쌓이고 쌓여야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평소 내 마음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곧 퇴직한다”는 말을 듣더니, 불쑥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존경합니다”라고 한다. 내가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삶을 살아왔나 돌아보며 죄스럽다.

물은 본래부터 물로 이 세상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비로소 물이 되었으되, 서로 흩어지면 물은 물이 아니다. 내가 꽃을 보니 꽃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꽃과 나의 눈이 만나야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 만나지 않았거나 흩어지면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만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도 나 스스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의 부모님께서 만나셨기 때문에, 나는 내 어머님의 배속에 있을 수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아버님의 몸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이전에는 나는 어디에 있다가 온 것일까? 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본래 온 곳이 없다. 온 곳이 없이 이생에 와서, 수없이 많은 이런저런 인연을 만났으니, 삶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고, 이후 죽어서 이 몸이 흩어지면, 내 몸을 이루며 이생에 존재했던 몸과 모든 생각들도 간 곳 없이 흩어질 것이니, 이 몸은 또한 간 곳도 없으리라.

침대에 누워 꿈을 꾼다. 꿈속에 나는 보기 싫은 자를 만나 소름끼쳐하다가 문득 꿈에서 깨고 나니 아무도 없다. 그러나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꿈속에 나쁜 자도 있었고, 나도 있었다. 꿈속의 나와 그 자를 만든 것은 침대에 누워있는 나다. 현실의 내가 스스로 꿈을 만들어 꿈속을 여행할 때는 꿈속의 나를 나로 알지만, 꿈에서 깨고 나면 비로소 꿈속의 나는 본래 없었음을 알게 된다. 꿈속에서 한참 헤매고 있을 때는 꿈속의 나는 항상 있는 줄 알고 꿈속의 나에게 집착하여,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거나 도둑에게 쫓길 때면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다가, 깨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없었음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 세상에 태어나 신나게 인생의 여행길을 걷고 있는 나도, 혹시 저 세상에 있는 진짜 내가 만든 것은 아닐까? 마치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내가 꿈속의 나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도 무엇과 무엇이 만나 잠시 있다가 흩어지면 없는 것이니, 모두가 꿈이요, 환상이며, 물거품이요, 그림자와 같다.

이리저리 권력의 자리를 기웃거리다 어느 날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지위를 얻었구나. 닭벼슬만도 못한 벼슬자리 하나 얻어, 시키는 일이 죽음으로 가는 길인 줄도 모르고, 날뛰다가 어느 날 돌아보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으리라.

권력자의 종기를 빨아주며, 볼썽사납게 날뛰며 지위를 얻었지만 때가 되면 없다. 당신이 주군으로 모시는 자도 당신 못지않게 덜떨어지기는 매한가지로되, 뭐가 중하여 그리도 연연해하는가? 어차피 있지도 않은 권력을 유지하겠다고 그 난리니 말이요. 당신과 당신 자식에게 남는 것은 원망과 멸시뿐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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