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표해기 중 문학성 월등…‘표해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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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과거 보러 가다 재난 당해
장한철, 표류했던 경험 저술 
1786년 대정현감으로 부임

아기 장수 설화 속 주인공
오영관, 입도조 오태고 증손
내금위장·벽사도 찰방 역임
최근 애월읍 한담 바닷가 마을에 복원된 대정현감 장한철 생가의 모습. 장한철은 배를 타고 육지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했던 경험을 토대로 ‘표해록’을 저술했다.
최근 애월읍 한담 바닷가 마을에 복원된 대정현감 장한철 생가의 모습. 장한철은 배를 타고 육지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했던 경험을 토대로 ‘표해록’을 저술했다.

이 장에서는 대정현감 등 대정현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배 후손인 찰방 오영관에 관한 설화

화순오씨 제주 입도조 오태고의 증손인 오영관은, 1694년 대정읍 인성리에서 오세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1722년 무과에 급제한 오영관은 내금위장과 벽사도 찰방을 지냈다. 

찰방은 조선시대 역마를 관리하던 종6품의 벼슬이다. 전라도 좌면에 속했던 벽사도는 오늘날 장흥지역으로 9개의 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입도조 오태고는 시조 오원의 19세손이다. 오태고의 아버지 오덕립은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좌승지를 거쳐 송화현감을 지낸 후, 인조반정 이후 집권층의 배척으로 대정현에 유배됐다. 복권 후 오덕립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전라도 나주로 귀향해 초야에 은거했다. 오덕립의 아들 오태고가 1639년 전력부위(정9품 무관직)의 벼슬로 부친의 유배지 대정을 찾았다. 그리고 대정현의 빼어난 지형에 감탄한 오태고는 후손들의 앞날을 위해 대정골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오태고는 아들 형제를 낳았는데, 큰아들 세인은 용양위부사과이고, 둘째인 세현은 종6품 무관직인 병절교위를 지냈으니, 이가 바로 찰방 오영관의 아버지다. 오영관의 무덤은 안덕면 덕수리(1646번지) 북쪽 외곽지에 있다. 제주설화에 등장하는 오찰방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 인물이 어떻게 설화에 반영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안덕면 덕수리에 있는 오세현·오영관 부자 묘역.
안덕면 덕수리에 있는 오세현·오영관 부자 묘역.

▲오찰방 설화

안덕면 덕수리에 살았던 오찰방의 아버지는 부자였다. 어머니가 임신하자 아버지는 아들인 줄 알고 소 열 마리를 잡아 먹였다. 열 달을 기다려 낳은 아기가 딸이라 오찰방의 아버지는 실망이 컸다. 어머니가 다시 임신을 하자 또 딸을 날까봐 소 아홉 마리만 잡아 먹였다. 이번에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자랄수록 기운이 세고 담력이 큰 오찰방은 마을 씨름판마다 평정하곤 했다. 적수가 없다 보니 잘난 척해 동네사람들이 싫어하자 아버지가 오찰방에게 주의를 주었다. 말 안 듣는 오찰방을 때리려 하면 오찰방은 나막신을 신은 채 산방산으로 도망쳤다. 아버지가 잡으러 가면 오찰방은 어느새 산방산 아래 용머리로 달아나 버렸다. 부부는 아들이 건방져서 이제 가문이 기울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어느 날 아들을 먹일 술과 자기가 마실 술을 따로 담그라고 부인에게 주문한 부친이 며칠 후 오찰방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남자로 태어나서 문무를 고루 갖춰야 후손들에게 명예를 전할 수 있을 텐데, 너는 술도 못 마시고 잘난 체만 하니, 오늘 나하고 술이나 마셔보자.” 이에 오찰방이 마루에 앉자 어머니는 술동이 둘을 내왔다. 부친 술동이에는 약한 술을, 오찰방에게는 독한 술을 부었다. 어머니가 따르는 술을 순식간에 마신 오찰방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자 부부는 오찰방의 윗옷을 벗기고 겨드랑이를 살폈다. 거기에는 명주로 감싼 날개가 있었다. 부부는 불로 달군 인두로 날개를 지져 없애버렸다. 그 후 팔도 유람길에 오른 오찰방이 과거를 보러 한양에 당도하니, 대궐문에는 ‘황소 탄 도적놈을 잡을 인재가 있으면 천금 상에 만호를 봉해 준다.’라는 방이 붙어 있었다. 이를 본 오찰방은 입궐해 도적놈을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대궐을 지키던 어느 날 밤 황소 탄 도적이 나타나자 오찰방이 화살을 날렸다. 그런데 도적은 한 손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쉽게 잡았다. 그 순간 오찰방이 삼백 근의 철망을 던져 도적의 몸을 잡고 보니 도깨비가 변한 빗자루였다. 입궐 명령을 받은 오찰방은 말을 타고 가다가 궁궐 앞 문간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명을 받들기 위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아이고 아까운 인재로다.’하며 담당 관리는 아쉬워했다. 그때 오찰방이 말을 탄 채로 임금 앞으로 나아갔다면 어영대장이 됐을 것이나, 제주 섬에서 태어나서 마음이 작다 하여 임금님은 찰방 벼슬을 주었다. 

이렇듯 제주도 아기 장수 설화는 좌절된 영웅을 다루고 있다. 날개 달린 아기 장수들은 역적이 되는 숙명을 타고 난다. 부모는 날개 달린 아기를 죽여야만 역적이 되는 걸 막을 수 있다. 결국 아기 장수 설화는 변방 사람들의 기개를 꺾는 지역 차별의 이념으로 포장돼 있다고 하겠다. 지배 체제에 대한 저항 대신에 순응케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이 세속에 회자 되다 보면 민중들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을 갖기보다는 체념하고 순응하는 심리 구조를 갖게 될 것이기에. 

한편 소 열 마리를 먹고 태어난 누이가 아홉 마리를 먹고 태어난 오찰방을 힘으로 꺾는 장면은, 힘을 믿고 잘난 체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주기 위함이다. 오찰방이 제주도 전역의 씨름판을 휩쓸고 다니다 겨룰 장사가 없자, 잘난 체하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서 오찰방을 패배케 하여 오찰방의 오만한 마음을 고치게 했던 것이다. 오찰방의 씨름 설화는 또한, 남성과도 당당히 겨루고 이기는 제주의 여성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국립제주박물관에 보관된 장한철의 ‘표해록’
국립제주박물관에 보관된 장한철의 ‘표해록’

▲대정현감 장한철

‘漂海錄(표해록)’으로 널리 알려진 장한철은, 1744년 애월읍에서 태어나 향시에 합격한 후, 1770년 한양에서 치르는 대과를 보러 배를 타고 육지로 가다 풍랑을 만나, 일본 오키나와의 호산도라는 섬에 표착했다. 해적에게 값진 물건을 뺏기는 등 심한 고초를 겪은 장한철 일행은, 일본으로 향하던 안남(베트남) 상선에 구사일생으로 구조된다. 그러나 한라산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던 일행들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하선해야 했다. 그들을 실은 배가 풍랑을 만나 어렵사리 청산도에 표착했으나, 일행 29명 중 8명만이 살아남았다. 

이후 한양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하나 낙방하고 제주로 돌아온 1771년, 장한철이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책이 표해록이다. 장한철의 표해록에는 폭풍을 만나 조난된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감정들과 희한하고 다양한 경험, 해류와 이국의 풍습, 설문대할망 설화와 노인성 등이 쓰여져 있다. 표해록은 학계에 보고된 조선시대 표해기(漂海記) 가운데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문학지로 정평이 나 있다. 해양문학의 백미라는 가치를 인정받은 표해록은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돼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775년 별시에 합격한 장한철은, 성균관 학유·가낭청·강원도 산운역 찰방 등을 지내다 1786년 대정현감으로 부임했다. 대정현감 재임 시 전염병이 창궐해 대정사람 이환과 더불어 기민 구제에 헌신하다가, 1787년 강원도 섭곡 현령을 제수받아 제주를 떠났다. 

일기체로 쓰인 표해록을 그의 후손 장응선(애월상고 초대교장)이 소장하고 있던 중, 1959년 서울대 정병욱 교수가 학술조사차 내도했을 때 표해록을 발견, 번역해 출판하니, 해양 문학의 백미로 평가되며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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