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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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섭 편집위원

‘간첩 잡아 애국하고 유신으로 번영하자’, ‘삼천만이 살펴보면 숨은 간첩 설 곳 없다’. 글자 수가 16자의 표어는 리듬감이 좋다.

단란주점이든 노래방이든 노래연습장에서 어떤 노래에도 리듬을 잘 타면 과거 간첩 관련 표어를 많이 짓거나 접했던 사람이다. 리듬감이 좋다보니 외우기도 어렵지 않다.

그래서 군부독재정권은 초등생을 대상으로 반공방첩 표어 짓기 대회를 그렇게 많이 열었나보다.

1977년 간첩 신고포상금이 500만원이었고, 간첩선 신고는 1000만원이었다. 당시로서는 큰돈이다.

이 때문에 1970~1980년대를 요약하는 단어로는 ‘수상한 사람’을 들 수 있다.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는 게 어른이든 어린이든 간에 의무였다.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인 ‘113 수사본부’는 매주 간첩을 잡으며 1973년부터 1983년까지 운영됐다.

▲제주시 삼양동 도련마을에는 ‘수상한 집’이 있다. 2019년 6월에 지어진 집이다.

이곳은 원래 강광보씨가 살던 집이다. 강씨는 1960년대 초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1979년 제주로 강제 추방됐다. 당시 강씨는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받았다. 간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문제는 7년이 지난 1986년 같은 내용으로 다시 붙잡혀 고문을 받은 끝에 허위자백을 했다. 그는 결국 간첩 혐의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그는 2017년 재심청구로 31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수상한 집’은 강씨가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과 시민의 후원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는 ‘수상한 집’이 아니고 ‘억울한 집’이다. 도련마을에는 ‘만년필 간첩 사건’으로 알려진 고(故) 김태주씨 3남매도 있다. 1960년대 사촌형제와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만년필이 북한산이었던 것이다.

김씨는 1968년 7월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또한 남동생과 여동생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재심청구로 2019년 1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김씨와 남동생은 이미 숨진 뒤였다.

▲강성민 제주도의원이 군부독재정권 시절 간첩 조작 사건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도내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회복과 지원을 위한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고문에 가짜 간첩이 돼 숨 죽여 산 피해자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야만의 시대에 이뤄진 비극이다. 도의회가 지금이라도 이들을 보듬겠다니 다행이다.

상처 받은 영혼에 우리가 줄 수 있는 건 따뜻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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